박지원은 청국말을 보고난 후 초라한 우리의 말을 보니 그가 국내에 있을 때에 그의 친구인 정석치(영조 때의 화가인 鄭喆祚, 석치는 그의 호임)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 열하일기(熱河日記) 이다. 왜 교미를 시키지 않는지 이유는 불명하나 말을 잘못 키워 오래가지 않으면 베갯머리에서 키울 수 있는 침마(枕馬)가 될 것이라고 한 것은 오늘날의 제주마(濟州馬)를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 같다.
또한 무엇 때문에 좋은 씨수마(種牡馬)를 받지 못한다고 하는가? 말은 커야하고 작아서는 아니 되며 튼튼해야 하고 약해서는 아니 되며, 날랜 말을 구해야 하고 노둔한 말을 구해서는 아니 된다. 무거운 짐을 실어 먼 길을 가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만약 무거운 짐을 실어 먼 길을 가게 한다면 토산말은 이러하니 단 하루도 집안일에 쓸 수 없다. 무비(武備)와 군용(軍用)을 소홀히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무비를 갖추고 군용을 세우려 한다면 토산말(제주마)은 이러하니 단 하루도 군사(軍事)일에 쓸 수 없게 된다.
이제 중국과 우리가 태평할 때이니 아주 좋은 수말과 암말 수십 마리를 구한다면 중국도 아마 말 수십 마리를 아까와 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외국이 말을 구하여 사사로이 기르는 것을 중국이 싫어한다면, 해마다 드나드는 사신 편에 몰래 사오게 한다면 어찌 그럴 기회가 없겠는가? 말을 구해다가 서울 가까이 수초가 풍성한 곳에 10년만 종자를 받아서 차츰 제주도와 각 감목(監牧)에 옮겨다가 말의 종자를 갈게 하되, 그 번식시키는 방법은 마땅히 주례(周禮)와 월령(月令)에 따라서 길러야 할 것이다.
주례에 ‘말은 수컷이 ¼이 되게 한다.’고 하였고, 그 주석에는 ‘그 타는 성품에 맞게 하려는 것이니 생물은 기질이 같으면 마음도 같다.’고 하였고 정사농(후한 명제때 명신인 鄭衆, 그의 아버지와 함께 주례를 해설하는 大司農이 되었으므로 그렇게 부름)은 ‘수컷을 ¼로 한다는 것은 암컷 셋에 수컷 하나를 둔다는 뜻이다’하였다.
月令에 보면 ‘등마(날뛰는 말, 발정기의 수말)를 암컷의 목장에 놓아주기 알맞다’고 하였으며, 진혜전(청나라 건륭제대의 사람, 오례통고의 저자)은 유인(말 다루는 관원)이 수말을 편안하게 부려 너무 피로하지 않게 하는 까닭은 그 기혈을 안정시켜 주기 위해서이고 교인(주나라때 마정 담당관리)이 여름에 수말을 거세하는 것은 암말이 새끼를 베었기 때문이다‘하였다. 수말을 거세해서 암말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말을 번식시키는데 근본이 되는 것이니, 이는 다 옛 임금이 때에 순응해서 생물을 길러 그 생물의 본성을 다하게 한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봄이 되어 풀이 푸르게 자라면 수놈에게 방울을 달아 마음대로교미하게 하는데, 수놈의 주인은 한 번에 은 5돈을 받고, 나중에 태어난 말이나 노새가 튼튼하고 날쌔면 다시 은 5돈을 받는다. 생겨난 노새나 말이 날래지 못하고 털빛깔이 좋지 않거나 성질이 잘 길들지 않으면 반드시 거세하여 그 씨를 받지 못하게 하고, 수컷은 몸집이 크고, 성질이 길들이기 쉬운 놈을 좋은 것으로 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감목(監牧)은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재래마(土種)에서만 씨수마로 사용하므로 갈수록 점점 더 작아져서 마침내 두엄이나 땔나무를 싣는 것조차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물며 한 나라의 군사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좋은 씨수마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을 관원이 망아지 거세할 줄 모른다고 하는가?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모든 일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옛날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어떤 사람이 하인 더러 말에게 콩을 더 주라고 하였다가 전랑(銓郞:관리의 천거권을 가진 吏曹의 正郞과 左郞)에게 지탄을 받은 일이 있었고, 근래에 한 학사가 말을 매우 좋아하여 말을 알아보는 재주가 백락(伯樂)과 다름없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비웃어 ‘옛날에 난양도위(爛羊都尉)가 있었다더니 지금에는 이마학사(理馬學士)가 있구나’하였다고 한다. 사대부들의 까다롭기가 이와 같았다. 나라의 대정(大政)으로 생각지 않고 그러한 일들에 관여하는 것을 수치로만 여겨 하인의 손에 맡겼다. 비록 감목이라는 벼슬이 실직은 아니더라도 그 직책에 있는 사람이 목마의 법을 전연 모르는데, 그것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배우려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관원이 망아지 거세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박지원이 본 우리나라의 마산정책에 잘못 된 것이 사람을 잘못 쓴다는 것과 말 키우는 것과 같은 일은 하인들이나 할 일이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한 생각은 주자학의 영향으로 궂은일은 하인들에게 시키고 자기들은 책이나 읽고 다스리는데 만 치중하다보니, 그때부터 내려온 잘못된 생각이 오늘날의 권위주의니 관료주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박지원의 이와 같은 지적은 오늘날 말을 키우고 사양하는 곳, 또는 말을 다루는 곳에서 없다고 할 수 없으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곰곰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 말이 좋아서 이 직업을 택했노라 하면서도 말의 가려운 곳을 모르고 말이 좋아 말을 탄다고 하면서도 안장을 지울 줄도 모르고 다 탄 후에 말에게 한번 토닥거려 주지도 않고 모두가 관리인에게 맡기게 된다.
요약하면 조선시대 초기의 제주도 목마장은 고려시대의 목장운영체제를 답습(踏襲)하였으나 세종11년부터 한라산기슭(해발200~600m)에 잣성을 쌓아 10소장으로 나누었고 1~6소장은 제주판관, 7~8소장은 대정현감, 9~10소장은 정의현감이 감목관을 겸임하여 국마목장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중종17년 특진관 고형산은 아뢰기를, 제주목마장에는 말이 2만 여필이나 쓸 만한 말이 없습니다. 근래에 진상하는 것도 명색이 없는 말이고, 제주의 세 고을에 있는 말이 전에 비하면 절반으로 감소되었으니 그 수효를 수정해야 합니다. 근래에 농사가 흉년이기 때문에 점마를 보내지 않았는데, 마정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신이 젊었을 때 일찍이 보건대, 종친들이 타는 말도 살지고 장대할 뿐만 아니라 모두 색마였는데, 지금은 어승마도 많이 구할 수 없습니다. 저 야인들의 말이 성질이 순하고 또한 몸집이 크니, 만일 공상(貢上)하게 할 수 있다면 좋은 어승마를 얻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29년 정원이 사복시의 말에 따라 아뢰기를 이제 제주목사의 계본(啓本)을 보니 도체찰사가 행이(行移)한 말 50필은 뽑아내기 어렵다. 고 하였습니다. 근년에 제주의 말이 많이 나온 것은 그 형세가 그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행이(行移)하여 더 뽑아내게 하더라도 필시 쓸 만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등을 아뢴 것을 보면 국마장의 씨수마는 점점 퇴화해 갔으나 김만일 등 개인목장은 씨수마에 상처를 내어 공마로는 부적합한 말로 만들어 활용하였기 때문에 준마를 많이 생산하였다.
특히 효종9년(1658)에 제주목사 이회(李檜)의 건의에 따라 김만일의 동·서 별목장과 교래리를 중심으로 물장올, 바늘오름, 물장오리,산굼부리, 성불오름, 대록산, 물영아리오름에 개설한 산마장(침장, 상장, 녹산장, 갑마장)의 감목관 김대길(재직1659~1668년: 金萬鎰 세 번째 아들)이후 218년 간 경주 김씨 문장(門長)이 천망하여 산마감목관직을 세습하므로 특유의 목장관리기술 및 운영이 전승되어 준마(駿馬)를 생산하여 전마(戰馬))와 어승마(御乘馬), 식년공마 때는 산마 200필 등을 국가에 공마봉진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말기의 제주도목마장은 매년 능력이 우수한 수말(牡馬;駿馬)만 선발하여 공마를 하였으므로 씨수마(種牡馬)로 활용할 말이 거의 없었고, 호마(胡馬)인 몽골마, 대완마 등도 수입되지 않아 열세한 씨수마(種牡馬)를 활용하여 계속 근친교배를 시키게 되어 제주마는 점점 왜소한 말인 조랑말(矮馬:pony)화 되었다.
(도음자료:sillok.history.go.kr, 한국말문화발달사, 제주도제주마)
<(39)제주도목마장의 운영과 도민 및 목자생활에서 계속>
박지원은 열하일기 내용 중 말을 사육함에 한심스러운 일에 대해 걱정을 하고 그것을 고쳐야 하는데 우리의 말 키우는 방법이나 조교 또는 말 관리 등에 대하여 몇 가지가 괴이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말등에 물건을 싣는다는 것은 천하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수레가 다니지 않으므로 물건 수송은 말 등에만 의지하는데 말의 힘은 헤아리지 아니하고 무거운 물건을 싣고자 하는 욕심으로 부득이 더운죽을 먹여 힘을 쓰게 하기 때문에 정강이가 약하고 말굽이 연하여 한번 교미하고 나면 뒤를 못 가눈다. 그래서 교미를 시키지 않으니 말은 어디서 날것인가 걱정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니라, 말을 다루는 방법이 괴이하고 먹여 기르는 방법이 옳지 못하여 그 좋은 종자를 받지 못하고 관원이 망아지 거세(去勢)하는 방법에 어둡기 때문이다. 그리고도 말채찍만 잡으면 “우리나라에는 좋은 말이 없다.”고 하는데, 어찌 우리나라엔들 좋은 말이 없으랴? 이처럼 한심스러운 일들이 이루 손을 꼽아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이 첫 번째 괴이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말 다루는 법은 고삐가 단단히 매여지지 않았는가를 두려워하여 달릴 때에는 끈을 꽉 잡아당기는 괴로움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쉴 때는 말이 땅에 굴러 모래 목욕하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므로 사람과 말의 뜻이 서로 통하지 아니하며, 사람은 걸핏하면 꾸짖고 말은 항상 노여움을 품고 있다. 이것이 두 번째 괴이한 말 다루는 법이다.
말에게 무엇을 먹여 기르는 방법이 옳지 못하다고 하는가?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간절한데, 우리나라의 말은 찬 물을 마시게 하는 일이 없다. 말의 성질은 익힌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싫은데 그것은 더운 것이 병이 되기 때문이다. 콩이나 여물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짜게 해서 물을 마시게 하려는 것이고 물을 마시도록 하는 것은 물을 많이 마셔서 오줌을 잘 누게 하려는 것이고, 오줌을 잘 누게 하려는 것은 몸의 열을 풀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찬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그 정강이를 튼튼하게 하고, 말굽을 단단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말은 반드시 콩을 삶아서 먹이고, 여물을 끓여서 먹이기 때문에 하루만 달려도 저절로 열이 나서 병이 되고 한 끼니만 죽을 걸러도 내내 허약하여져서 걸음이 느려지는데 이것은 익힌 것을 먹이기 때문이다. 전마(戰馬)에 죽을 먹이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다. 이것이 세 번째 괴이한 말 기르는 법이다.
(도음자료:한국말문화발달사)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제주마문화연구소장ㆍ제주도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