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廣場)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이다. 우리나라의 광장 중에는 여의도가 대표적이다. 최인훈(崔仁勳)의 장편소설 ‘광장’은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파헤쳤다. 주인공 이명준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에 드나들면서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은 죽어버린’ 남한에 구토를 느끼고 월북한다. ‘끝없이 복창만 강요하는’ 북한 역시 진정한 광장은 없고 퇴색한 구호와 관료제도만 있을 뿐, 그가 기댈 곳이 없다. 그래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 인도로 가는 도중 배 위에서 투신자살한다. 광장을 되살려 보려는 작가의 의지가 살아 숨쉬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렇다면 우리 제주의 대표적인 광장은 어디일까? 과거에는 관덕정 마당이며, 지금은 시청 어울림 마당이 나름대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관덕정(觀德亭)은 활을 쏘던 사정(射亭)으로, 관덕정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사이관덕(射以觀德)’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활 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덕을 본다’라는 의미로, 쉽게 말해 ‘시합이나 내기를 해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다’라는 뜻이다. 목사가 이곳에서 병졸의 사열을 받기도 하고, 큰 잔치가 벌어지기도 하고 또 죄를 다스리는 형장의 역할까지 했다. 해방 후 1956년까지는 임시도청, 도의회 의사당, 북제주군청 임시청사, 미공보원 상설 문화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옛날 오일장이 섰던 자리이다. 옛 사진을 보면 잠방이 위에 모자를 쓴 사내가 웃고 있으며, 모인 숫자로 보아 오일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입춘굿놀이 사진은 지금 우체국 옆 누대에 구경꾼들이 잔뜩 올라가 있고, 가면무를 추는 남녀 무당 다섯이 춤사위가 한창 신이 나 있다. 4?3의 원인을 제공한 3?1 사건의 도화선을 일으킨 것도 이곳이며, 당시 경찰관들이 시위 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자행하였다.
특히 가톨릭의 성지로, 1901년 5월 28일 성내로 진입한 민군(民軍)은 천주교인들을 색출하여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참사를 자행한, 저 유명한 신축교란(辛丑敎亂) 현장이다. 그래서 향도 이재수를 참수(斬首)한 곳이며, 수많은 천주교인과 양민들이 목숨을 잃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처럼 역사적 숨결이 역력한 관덕정이 원형복원이 이루어진다니 일단 환영할 일이다. 원형복원에 따른 상량식이 지난 해 12월 29일 현지에서 열렸으며, 올 6월쯤이면 원래의 그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온다.
관덕정은 조선 세종30년(1448년)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창건된 뒤 고종 19년(1882년)까지 여러 차례 증수 과정을 거쳤다. 조선말기에는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조정을 성토하는 집합장소로, 또한 민란 주동자의 처형장으로 이용된 제주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4년 개설도로에 지붕처마가 걸린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일본인들이 454.5cm나 되던 처마를 60.6cm나 잘라버려, 그 장중하던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이번 복원공사에서는 처마와 변형된 용마루, 사라진 기둥낙양과 머름중방 등을 복원하게 된다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관덕정 옆으로 제주목 관아건물이 복원되었지만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광장이라는 그 역사적 현장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아, 너무 아쉬운 느낌이다. 사람들은 모여들기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광장 역할을 하는 장소는 이제 시청 주변으로 옮겨진 느낌이다.
김 관 후 (북제주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