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공마(濟州貢馬)는 흉년에 정지 또는 연기되었으나 매년 수마(雄馬)4~6세인 200~600필(匹)을 봉진했는데 어승마, 연례 진상마, 체임마 등은 준마(駿馬)만을 선발함에 따라 국(國)·사(私)목마장에는 씨수마(種牡馬) 선발과 확보 및 보호에 어려움이 계속되어 목마장마다 생산되는 망아지들이 점점 퇴화되어 갔다.
그러나 김만일 사목장 (私牧場)은 씨수마의 눈(目) 등에 상처(傷處)내어 공마 선발에 제외 되도록 하여 씨수마로 활용함으로서 준마(駿馬)들을 생산하였다.
영조 14년(1738)에 사복시첨정(司僕侍僉正) 김태연(金泰衍)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제주마의 씨수마(種牡馬)가 전보다 작아져서 가교마(駕轎馬:임금의 수례를 끄는 마는 체고, 모색, 외모 등이 우수한 마를 선발)까지도 중국산 말을 섞어 쓰니, 참으로 미안합니다. 신이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니, 숙종때 송정규(宋廷奎)가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 장계를 올려, 중국의 말 수십 필을 구입, 제주도에 방목하여 씨수마(種牡馬)를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사복시(司僕寺)의 재정이 빈곤하여 곧 시행하지 못하였고, 그 뒤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오명항(吳命恒)이 사복시 제조였을 때에 평안도에 지시하여 북방의 말을 매매하여 철산 탄도목장에 방목하게 하였는데, 이 목장은 그 뒤부터 번성하였으니 보람이 있었다 하겠습니다.”
제주마의 퇴화를 임금도 직접 걱정을 하고 그 원인이 말을 키우는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英祖 24년에 직접 전수하기를 “마정(馬政)은 나라의 중요한 일인데, 더구나 이때이겠는가? 전에도 이미 지적했고 이제 신하들이 아뢰는 것을 들으니 제주마는 아주 씨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전에 들은 말이다.
제주도는 국마(國馬)의 부고(府庫)인데도 이러하니 나라의 일을 꾀하는데 있어 방치할 수 없다. 지난 예(例)를 존속시키는 도리도 없을 수 없으니, 3년에 한하여 연례마(年例馬) 8필과 어승마(御乘馬) 및 삼명일마(三名日馬)외의 세공마(歲貢馬), 산장마(山場馬)는 특별히 봉진(封進)을 멈추고 망아지를 받아 불리게 하라, 대저 말은 한 섬에서 생산되는데도 체신마(遞任馬)와 다른 말에 차이가 있으니, 이것은 말을 기르는 것이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흉년이면 봉진을 멈추게 하는 것은 봉진에 폐단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특히 먹여 기른 폐단을 덜기 위한 것인데, 근년이후로 貢馬가 한심한 가운데서도, 이른바 연례마(年例馬) 8필은 곧 옛 팔준마(八駿馬)의 뜻에 비기는 것이므로 왕년에는 몸집이 크고 탈만하여 遞任馬보다 나았으나 이제는 몸집이 작고 재능이 없으므로 이름은 달라도 실속은 세공마(歲貢馬)와 같으니 이것은 목사가 된 자들이 게을러서 위에 바치는 것을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수를 줄인 후에는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년예마(年例馬), 어승마(御乘馬)를 홍늑(紅勒;붉은색의 굴레)하여 봉진(封進)하는 것도 사체(事體)가 중하거니와 이제 연경의 시장에서 살 수 없으므로 국마로 써야겠으므로 어승(御乘)에 맞을 만한 것을 가려서 봉진하라. 이렇게 한 연후에는 혹 삼가지 않으면 그 목사를 엄중히 다스리겠다. 이 뜻으로 엄히 시행하라.”
마(馬)사정이 얼마나 나빠졌으면 임금이 친히 세공마의 진상을 보류시키고 말을 잘 키우라고 당부했겠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말의 키가 작아진 것이 기르는 사람이 게을러서 또는 기후환경이 적당하지 않아서, 또는 사료가 부실한 경우도 해당될 것이며 나라에서는 제주마를 옛날과 같이 큰 말을 생산하기 위하여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영조 34년(1758)에 경연에서 신하들이 제주마의 개량방법에 대해 토론을 하였는데 결론은 서북지방의 시장이 열릴 때에 淸나라의 암말과 수말을 사서 제주에다 방목하여 종자를 개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3년 후 홍봉한(洪鳳漢)이 이르기를 ‘탐라에 보낸 씨받이 말은 별로 효과가 없다.’라고 함으로써 그 말들은 거두어서 다른 목장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당시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겨우 2~3년 후에 제주마가 개량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조정이 그만치 馬政의 부흥이 급하다보니 성급하게 처리한 것 같다.
제주도에서의 말 번식을 돕기 위하여 암말의 육지 반출을 금지하고 있었다. 정조 4년(1780)에 형조판사 겸 훈련대장(刑曹判書 兼 訓練隊長)으로 구선복(具善復)이 상소를 올려 “제주에서 봉진하는 것 가운데 암말을 봉진하도록 하여 北市에 주어 종마 수백 필을 가져다가 목장에서 기르기를 청합니다.” 라는 상소에 사복시에서 논의한 끝에 “참으로 마땅한 일이나 암말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법에는 뜻이 있는데 이제 길을 터서 봉진하게 되면 사마(私馬)가 섞여 나와서 혹 폐단을 일으킬 염려가 없지 않으니 그만 두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여 암말의 반출을 계속 금지시키기로 하였다.
박지원은 정조 4년(1780) 44살 때, 영조의 부마(附馬)인 금성(錦城)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고종(高宗乾隆帝)의 칠순 진하사(進賀使)로 북경에 가게 되자 다시없는 좋은 기회라 하여 수행원으로 따라가서 견문을 많이 넓혔다.
그의 호 연암(燕岩)은 그가 1777년 개성에서 30리쯤 되는 제비바위로 내려가 독서에 전념하였는데 그의 호는 여기에 연루되며, 그가 연암으로 가게된 것은 목축에 관심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박지원은 북경을 다녀온 이후 그가 본 청의 풍습과 문물을 일기체로 정리하여 만든 것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서 요동의 수천리 평원을 거쳐 북경을 갔다가, 다시 건륭제가 피서중에 있는 열하(熱河)로 가 7일을 묵고, 도로 북경을 돌아와 여러 명사들과 석학들을 만나 정치, 경제, 산업, 병사, 천문, 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담론하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기 까지 두 달동안 보고 느낀 바를 적은 것이 열하일기이다.
그가 양주역관에서 청나라로 향해 떠날 때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아침밥을 먹은 후 나는 혼자서 말을 타고 한 걸음 앞서 떠났다. 말은 밤색에 정수리는 희고(모시갈기 적다 말), 날씬한 다리는 높은 발굽에, 머리는 날카롭고 허리는 짧고, 두 귀는 쫑긋하여 참으로 만 리라도 달릴 것 같다. 창대(말시종 이름)는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장목은 디에서 따르게 했다. 말안장에는 주머니 둘을 달아서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과 붓 두 자루 먹 하나, 공책 두 권, 정리록 한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처럼 간단하니 국경의 짐 조사시 아무리 엄하다하더라도 근심할 것이 없다.” 그는 본대로 들은 대로 기록하기 위해 미리 안장에다 붓과 종이, 먹과 벼루 등이 준비한 치밀성을 엿볼 수 있다.
열하일기의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 태학관을 방문 후 느낀 사항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내가 문을 나오니 문밖에 수백 마리의 말떼가 지나가는데, 한 목동이 썩 큰 말을 타고 옥수수대 하나를 들고 뒤따라간다. 또 소 삼사십 마리가 지나가는데, 코를 꿰지 않았고 뿔도 붙들어 매지 않았다. 뿔이 모두 한자가 넘겠고, 털빛이 푸른 것이 많다. 소가 씩씩거리며, 천방지축 달려가는데 마치 대오를 지어 가는 것 같다. 아침 방목을 시키러 가는 것 같다. 천천히 걸으면서 살펴보니 집집이 문을 열고 말, 나귀, 소, 양 따위를 몰아내는데 한 집에서 적어도 수십 마리씩이 나온다.”
이는 당시 중국에 가축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박지원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많은 말들을 불과 한 사람이 몰고 가는데도 대오가 정연하다는 것은 가축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을 그가 느꼈다.
“돌아와 태학관 밖에 매어둔 우리나라의 말의 꼴을 보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내가 일찍이 정석치(鄭石癡:영조 때의 화가인 鄭喆祚, 석치는 그의 호임)와 우리나라 토산말 값의 비쌈을 이야기 할 때 내가, ‘몇 십 년이 안가 담배통을 구유로 하여 베갯머리에서 말을 기르게 될 것일세.’하였더니 석치가 ‘그게 무슨 말인가?’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계속 늦가을 병아리로 씨받이하여 가면, 4∼5년 후에는 베개 속에서 울게 된다고 하여 이를 침계(枕鷄)라 하지 않는가? 말도 마찬가지 일세 종자가 작은데 점점 더 작아져서 침마(枕馬:애완용 pony)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므로 베개 속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또 그 침마라는 것을 타고 뒷간엘 가면 아주 좋겠구만 그래.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말 교미시키기를 꺼리므로 말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정모(貞牡),정빈( 貞牝:교미를 해본 일이 없는 수컷을 정모라 하고 암컷을 정빈이라 함)으로 있네, 지금 나라 안에 수만 마리의 말이 있지만은 교미를 시키지 않으니까 말이 번식하지 못하여 해마다 만여 마리의 말을 잃으니, 몇 십 년이 안가 침마(枕馬)까지도 종자가 마를 걸세.’하여 서로 웃으며 농담을 한 일이 있다.”
((38)씨수마의 문제점(2)에서 계속)
박지원이 연암에서 글을 읽기를 작정한 것은 목축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연암은 산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좌우의 황폐한 골짜기 마다 수초가 잘 자라 말, 소, 노새, 나귀 등을 수백 마리 키울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였다. 그는 일찍이 우리나라가 가난한 까닭은 목축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우리나라의 목장은 제주도의 것이 가장 크고 그 말은 모두 원나라의 세조가 보낸 씨수마로 4∼5백 년 동안 그 말만 갈지 않아 용모(날랜 말, 龍馬)나 악와(중국 한나라 무제때 감숙성 악와라는 곳에서 나왔다는 신마)와 같은 좋은 말이라도 끝내는 과하마나 관단마 따위 작고 느린 말이 될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관단마나 과하마를 타고 싸움터에 나가 적과 마주 싸울 수 있을 것인가가 그의 첫 번째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내구(궁중의 말관리 부서)에서 기르는 말에서부터 무장이 타는 말에 이르기까지 토산이 없고, 요양이나 심양등지에서 사 오는 것으로서 한 해에 겨우 네다섯 마리뿐인데 만일 요양이나 심양에서 말 수출을 금지 시킨다면 말을 어디서 사 올 것인가가 그의 두 번째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임금을 호종하는 백간들은 말을 남으로부터 빌려 타고 또 나귀를 타고 어마를 호종하니 그 꼴이 말이 아니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한심한 일이었다.
문신은 종이품이상은 초헌을 타므로 말을 탈 일이 없고 또 말을 기르기도 어려우므로 아예 말을 버리고, 그 자제들도 걷는 대신 겨우 조그만 나귀를 기를 뿐이다. 옛날에 백리의 나라 대부는 수레 열대를 갖추어 놓는다 하였으나 둘레가 몇 천리인 우리나라의 향상이라면 수레를 백대 쯤 갖추어야 할 것인데, 이제 우리나라의 대부의 집에서 과연 수레 몇 대가 나올 것인가 생각하니 이것이 넷째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세?의 초관은 군사 100명의 어른인데, 집이 가난해서 말을 갖추지 못하여 한 달 세 번하는 조련에 어떤 이는 임시로 말을 빌려 세내어 타기도 한다. 군사가 말을 세내어 타고 간다는 것이 이웃나라에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니 이것이 다섯째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서울 병영에 있는 장사나 장군이 이러할 정도니 팔도에 배치해 놓은 기사는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을 것이 뻔 한 노릇이다. 이것이 그의 여섯째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나라 안의 역원에는 모두 토산품 중에서도 그런대로 나은 것을 배치해 두는데 한번 사신이나 손님이 거쳐 가면 그 말은 죽지 않으면 병이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사신이나 손님이 앉는 쌍가마부터가 무거운데다 반드시 하인 네 사람이 가마채를 잡고 좌우에서 몸을 실어 흔들리지 않도록 하므로, 말은 이미 실은 것도 무거운데 이렇게 네 사람의 무게가 더해지므로 부득이 앞으로 빨리 달리지 않을 수 없어서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달리게 되기 때문에 그 말이 죽지 않으면 병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수록 많이 죽어가고 말 값은 갈수록 비싸진다. 이것이 일곱째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
제주마문화연구소장ㆍ제주도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