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흉년이라는 것은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한 것을 이야기 하며 특히 마필(馬匹)의 수와 말 번식이 급격히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중산간토양은 암갈색 화산회토양으로서 매우 척박(제주도에서는 ‘뜬땅’이라고 부름)하며 돌과 자갈이 많아 농경지로서는 토지생산성이 해안지대보다 떨어지나, 자연목초가 자랄 정도의 비옥도가 되는 수준으로 비가 그쳐 며칠이 지나면 수분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시로서는 초지가 개량된 것도 아니고 그저 한라산 중턱에다 방목하는 상태이므로 비만 오지 않으면 풀이 자랄 수가 없었으며, 흉년이 들면 어미마(牝馬)나 망아지 할 것 없이 먹을 풀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야산에 방목하다보니 사람의 손이 갈 수가 없고 오히려 사람도 먹을 것이 없다보니 그 피해는 말에게만 돌아갔다.
영조 37년(1761)에 “흉년이 들어 제주마의 공마를 다음 해에 멈추는 것이 좋겠다.” 는 기록이 있으며 39년(1763)에도 본도에 흉년이 들어서 목사(牧使)이달이 장청(狀請)하여 삼명일 진상(進上)은 내년 가을까지 봉진(封進)을 정지시켜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고 내년의 공마도 일체 봉진을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46년에는 제주 판관이 공마를 보냈는데 3필이 모두 쇠약하므로 처벌을 요구하는 신하에게 임금이 “말이 곡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예기(禮記)에 실려 있건만 백성이 이렇게 굶주리는데 말이 쇠약한 것을 어찌 논하겠는가? 문책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종31년에는 찰리사(察理使) 이규원의 서면 보고를 보건데 올해에 본 주(州)에서 공마는 중대한 일에 속하는데 요즘 민란(民亂)으로 연도 각 수령이 거의 다 숨어버리고 또 혹시 불량배들이 약탈하는 폐단도 있으니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의하기를
차라리 기한을 미루어 명년 봄에 바치도록 하였다.
제주 출신 강성익(康聖翊)은 정조(1781) 때에 등재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고 제주도에는 해마다 공마의 마필수가 많아지게 되었으나 1794~1795(甲寅~乙卯)년 흉년으로 국마가 1,500여필이 폐사되어 도내에 사육되는 마필수가 줄어들어 3천여 필밖에 없게 되자, 도민들에게 대신 징수하게 되었다. 도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강성익은 지평으로서 조정의 부름을 받자 상소로 공마를 그만 둘 것을 논하니 그것을 받아들여 검토해 주었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상소문 내용 참고).
정조 24년(1800) 윤 4월 26일 전 지평(持平) 강성익(康聖翊)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제주에서 자주 흉년이 들어 그때마다 연읍(沿邑)에서 양곡이 드려 왔사오나 비국(備局)의 변비곡을 본주(本州)에 설치한 창고로 이관하여 흉년에 대비하시옵고 목사에게 수 천석의 변비곡을 삼읍에 각각 나누어 비치 할 수 있도록 별고(別庫)를 따로 신설하게 하셔야 하옵나이다. 그것이 섬백성(島民)들을 위한 참다운 구황책(救荒策)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본주에서는 봄으로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마파람이 아니 불고 장마비가 아니 내린 날이 하루도 없었소이다.
비록 인가(人家)의 방안에 항아리며 자루 속에 저장하여 놓은 곡물(穀物)이라 할지라도 수년을 못가서 부패하고 싹이 돋아(發芽) 손만 대면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마침내는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까닭에 옛날부터로 섬안(島中)에 저축해 둔 곡식(貯藏穀)이 없음이 이러한 때문이옵니다.
섬안(島中:濟州島)에 기후가 이러 하온데 더구나 흙으로 쌓은(土築) 창고에 보관한 양곡이 어찌 궂은 비에 부패하지 않게 관리하며 여러 해를 넘겨도 썩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 하겠습니까. 무지한 섬 백성들은 모두 생각하기를 앞으로 나라에서 구제해 주는 일은 이 창고만 의지할 뿐 곡식을 옮겨오는 문제는 그 길이 영원히 막히게 되었으니, 수만 명의 백성들이 장차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고 이구동성으로 그 제도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새로 설치한 창고에 저축해 둔 것을 적당한 수량을 헤아려 변통하되 꾸었다가 받아들인 다른 지방의 환자곡 가운데 잘 마르고 알찬 것을 골라 해마다 한 번씩 새 창고의 것과 바꾼다면 이쪽이나 저쪽이 다 온전하여 피해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稟議)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여 주시옵소서.
아울러 제주목(本州)의 국둔마(國屯馬)의 마필수가 감축(減縮)된데 대하여 말씀드리면 지난 갑인 을인·묘년(甲寅 乙卯年:1794~1795)의 흉년은 역사상 일찍이 그 유래가 없던 일로서(前古未聞)소중한 인명(人命)도 미처 보존하지 못한 판국이라 미천한 말과 소(馬·牛))에 대하여 더욱 논의할 겨를이 없었으니, 쓰러져 죽은 국마(國馬)가 무려 1,500여 필(匹)에 이르렀사옵니다.
그 당시의 목사가 흉년을 치른 뒤라서 형편이 대징(代徵)을 하기가 어렵다, 는 장계(狀啓)을 올리자 비국(備局)에서는 그 이유와 사정을 고려하여 너그럽게 5년을 기한으로 그때에 가서 전량 받아들일 것을 허락한다. 는 뜻으로 공문을 내린 적이 있는데 금년이 곧 받아들여야 할 해입니다.
그런데 몇 해 사이에 굶어 죽은 목졸(牧卒)들이 수 없이 많아 죽은 사람의 몫으로 징수해내는 일(白骨徵捧)은 이미 말할 것도 없고 겨레붙이나 이웃사람에게 징수하는 일(徵族徵隣)은 기필코 권력을 동반하기 마련이옵니다. 이른바 개인소유로 기르는 것도 열 가구 중에 일곱 여덟 가구는 비었으니 관가의 명령이 아무리 엄중하더라도 어디서 사들여 바치겠습니까. 요즘에 와서 국가가 소유로 기르는 말이 차츰 늘어나 현재에 그 수를 모두 합하면 갑인·을 묘년(甲寅·乙卯年)이전에 비하여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옵니다. 신이 고향을 떠나올 때 살아남은 도민들과 지친 목졸(牧卒)들이 뱃머리에 모여들어 수일동안 끊임없이 호소하였나이다.
이는 실로 온 섬안(島中:濟州島)의 민정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한번 들은 일을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이르기를
“그대는 과인의 시종들 중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이러한 민폐를 자세히 알려주니 높이 찬양할 일이로다.
곡물창고를 비치할 때 대신들로부터 도민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그때 대신들 중에 도민들로 하여금 앉아서 구원을 기다리지 말고 섬 밖으로 나오도록 불러 드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과인이 거절한 것이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그대의 제의에도 의견들이 있을지니 과인이 조정에 명령하여 두 가지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도록 조치하겠노라.
마정(馬政)에 대하여 말하면 공축(公畜)이 이미 번식하여 이전의 총수보다 불어났다하니 다시 목졸에게 징수할 것이 있겠는가.
겨레붙이와 이웃사람에게 징수하면(徵族徵隣) 그 폐단은 저절로 목졸(牧卒) 이외의 평민에게 돌아갈 것이니 그 것은 너무도 불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 부임한 목사는 아직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니 아마 자기 임무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즉시 조정에 명령하여 관계자에게 남아있는 마필(馬匹)총수와 해당 관아에 보고하지 않은 이유와 사정을 자세히 물어본 다음 모든 상황을 검토하여 처리할 것이니 과인이 회답하기 전에 일체 징봉(徵捧)하지 말도록 할 것이다.
그대를 장령(掌令)으로 명하니 나중에 연석에 올라올 때 다시 섬안(島中:濟州島)의 일을 아뢰라” 하였다.
{(37)공마에 따른 국·사 목마장 씨수마의 문제점에서 계속]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제주마문화연구소장ㆍ제주도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