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2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우리 군에서는 일제강점기간인 만주사변으로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 동원되어 군인·군속·노무자·위안부(군·기업)등의 생활을 강요당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피해접수를 받아왔다.
그 결과 총 833명이 접수를 했다. 동원지역으로는 국내 270명, 국외 563명으로 유형별로는 군인 152명, 군속 146, 노무자 535명 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도전체 접수건수 2,409건의 35%에 해당하는 수치로 유난히 우리군 지역 피해자가 많은 이유는 지역적인 여건도 있겠지만 가난한 농민의 삶으로 시대에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정직함을 그 이유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장기화되고 그 범위가 확대되어 가자 전쟁물자와 함께 인력소모가 늘어나 노동력 부족현상의 심화는 눈에 보듯 뻔하였다.
일제는 이 문제를 우리 민족 등 힘없는 주변 국가를 동원하여 해결하고자 했다. 이 와중에 우리들의 가까운 이웃 선대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었고 광산이며 군수공장 등으로 끌려가 노예처럼 중노동에 시달리며 갖는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단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땀 흘리던 작업장이, 타던 배가 전쟁자원 공급이라는 명복하에 징용되면서 그들도 함께 징용되어 무보수 무임금에 목숨을 담보로 전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들은 일본 본토, 북해도,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끌려갔지만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특히 노동력 부족이 심해진 1944년 하반기부터 일제는 면사무소와 경찰인력 등을 동원하여 밭을 갈던 농민, 청·장년들은 말할 것도 없이 마을별로 할당된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그들은 어린 소년들까지도 끌고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잡곡밥에 소금국이 전부인 식사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보통 “함빠”라고 불리는 작은 숙소에서 소, 돼지 취급을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했다.
도망치다 잡히면 반죽음이 되도록 얻어맞았고, 안전시설이 안 되어 있는 작업장에서 사고로 불구가 되거나 죽어간 이웃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접수를 받으며 토해내는 그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비규환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동료들의 넋이 아직도 내주위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 같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느껴보며 그들을 위한 정부차원의 위령제라도 거행할 수 있다면 홀로 살아남은 마음의 짐이라도 벗을 수 있으련만 …”
마샬군도 윗제섬에서의 구사일생했다는 구좌읍 하도리 이공석 할아버지의 말이 맴돈다.
송 은 미 ( 북제주군 총무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