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마봉진과 목마장의 씨수마] 공마선은 정남풍에 출항, 해남ㆍ영암ㆍ강진에 도착
[공마봉진과 목마장의 씨수마] 공마선은 정남풍에 출항, 해남ㆍ영암ㆍ강진에 도착
  • 제주타임스
  • 승인 2006.0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목사는  공마선이 출항하기 전 선원과 배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정성껏 제수를 마련하여 공손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제주목마장에서 생산된 말을 실어 보내는 일은 삼읍의 수령들이 윤번으로 차원(差員)을 정하고 다른 배와는 달리 말은 실은 배가 육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강한 바람이 있은 연후에 비로소 배를 출발시킨다.

공마봉선해로(貢馬封送海路;貢馬通途)는 공마선이 조천관, 별도포, 어등포, 도근천(외도),애월포에서 정남풍(정남바람)에 출항하여 화탈섬(火脫島:관탈섬)→사서도(斜鼠島)→보길도(甫吉島)→경도(鯨頭)→광아도(廣鵝島)→갈두(葛頭)어란(魚蘭)→영암(靈巖)도착하거나, 보길도에서 이진(梨津)의 가리포(加里浦)→강진(康津)이나  관두량 완도(莞島)→해남(海南)에 도착하여 하륙한다.

그러나 화탈섬(火脫島)까지 왔을 때 안쪽바람이면 추자에 정박하여야 하며, 바깥바람 일 때는 진도에 정박하여 기다려야 하나 서쪽바람일 때는 흑사도의 홍의도, 가가도(可佳島)→백량(白梁)→외양(外洋:중국, 일본)으로 가며 동쪽바람은 청산(靑山),서안(鋤安),삼도(三島),동여서도(東餘鼠島)로, 남쪽바람은 옥구도(玉球島),일지도(一岐島: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한 섬)에 표도(漂到)하는 것이다.

소요시간은 풍랑에 따라 순풍에는12~24시간에 운송되나 일반적으로 2~4일, 그렇지 못했을 때는 5~10일에 도착했다.
육지에 도착한 공마수송은 각 읍에서 징발된 견마군(牽馬軍)에 의해 나주(羅州)→공주(公州)를 거처 한양(漢陽)에 도착하는 데에는 약1~2개월이 걸리며 바다에서의 조난과 수송비용(輸送費用)이 엄청났다. 공마선(貢馬船)은 봄부터 여름에 걸쳐 평년에 10여 척이 왕래하는 데에 영선천호( 領船千戶) 1인, 압령천호(押領千戶) 1인, 선장(船長) 1인, 사관(射官) 1인, 격군(格軍)은 대선(大船)이 43인, 중선이 37인, 소선이 34인이 승선(乘船)하여 노를 저었다.

임진왜란 이후 정조 18년(1794년) 공마보초등록(貢馬報草謄錄)에 의하면 공마선 10척에 말 298필 수송에 있어서 공마는 연례마(年例馬), 정조마(正朝馬), 동지마(冬至馬), 탄일마(誕日馬), 대징마(代徵馬), 산장진상별마(山場進上別馬) 등과 선장의 이름과 배의 크기(배 길이의 단위는 把: 두 팔을 편 길이)는 4~6把 및 배 당 28~33마필을 수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마는 매년 세공마(歲貢馬:연례적으로 보내는 말)와 식년공마(式年貢馬:3년마다 보내는 말) 또한 왕명에 의한 삼명일진상마(三名日進上馬:임금의 생일을 축하여 바치는 말, 동짓달에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함께 바치는 말, 정월 초하룻날에 바치는 말)와 연례진상마(年例進上馬), 어승마(御乘馬:임금이 타는 말), 체임마(遞任馬:3읍 수령이 교체되었을 때 국왕에게 바치는 말) 등 매년 평균 600필 정도 말을 조정에 바친 것으로 생각된다. 공마의 수송비는 처음에는 군량으로 충당했으나 그 비용이 늘어나 세종11년 전라도 관찰사는 둔전설치를 건의하였다. 그리고 공마가 하륙과 관리에 있어서 세종11년(1429)에 공마가 하륙하는 어란(於蘭)의 가까운 곳인 해진의 구산성(狗山城)안에 경작할 밭과 샘(泉)있어 성(城)과 관(館)을 설치하여 공마선이 파산하여 표류한 사람들을 구휼(救恤)하게 하였고 태종7년(1407)공마을 육지로 수송하는 과정에 굶주리고, 갈증이 심하면 물을 많이 먹어 폐사되는 말들이 있어 바다 포구에 성(城)을 쌓고 건초를 준비하여 하륙하는 날에는 성으로 몰아 넣어 다만 건초를 준 다음 풀어 놓아 물을 먹도록 하였다.

제주의 공마운임에 대한 기록은 목민심서(牧民心書) 戶典 6條 平賦(下)에 제주에서 공마할 때, 육지에 닿아서 말이 내리면 제주 사람들은 돌아가고 육지 사람들은 말을 몰 줄 모르기 때문에 흩어져 놓치기도 하고 부상을 입어 골절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여러 고을에서 돈과 곡식을 거두어 제주사람들에게 주고 서울까지 말을 몰고 가도록 하였다. 돈과 곡식이 마음에 충족하지 않으면 말을 흩어지게 하여 벼와 보리를 짓밟게 하면서 며칠을 두고 나가지 않았다. 고을에 공마가 도착하면 현감이 관복를 갖추어 말을 모니 제주사람들은 말을 일부러 흩어지게 하지 않았다.

이형상목사(숙종 28~29년)의 浩然琴書는 제주에서 육지지역과의 주요 통로인 別刀浦로 배들이 들어오는 모습과 삼의양악, 어승생, 거문악 등(3·4소장지역: 馬牧場), 원당망, 사라망, 화북진성이 그려져 있다. 別刀浦는 공마선이 출항했던 포구로 공마선은 이들 배들과 같은 모형으로 만들어 진 선박으로 조선시대 숙종37년(1711년) 日本派送通信使節이 이용했던 信史卜船은 대마도에서 파선된 것을 그려서 현재 對馬島 嚴原町 萬松院에 소장된 中村宗家文書에 있는 卜物船(군량의 수송에 이용했으며 그 크기는 3~4백석 선적)이다. 이 卜物船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항해에 적응케 만든 군선, 漕運船인 哨馬船, 通信社船, 貢馬船 등의 모형이 되어 훌륭한 선박인 韓船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천포·화북포에서 동쪽바람에, 도근천·애월포에서는 서쪽바람에서도 출항하였다. 대정현에서 출항하여 서풍이 불면 백량(白梁)에 다다르며 정의현에서 출항하여 동풍이 불면 추자도에 다다를 수 있으나 검색하는 까닭에 화북포와 조천포 두 포구 외에는 다른 포구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36)공마에 따른 국·사목마장 씨수마의 문제점에서 계속)

장   덕   진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 / 제주마문화연구소장ㆍ제주도문화재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