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의 눈물
추기경의 눈물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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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9월 초하루 순교한 김루치아는 곱추였다. 늙은데다 무식하고 병신이였기에 포도청에서도 별로 눈여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 천주교사상 논증이나 교리에 가장 밝은 여자였다. 그가 감옥에 갇힌때는 71세였다. 그는 형리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천당문이 아무리 좁다해도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1970년 박정권 시절 공식적으로 민주적 양심선언을 했던 고 지학순 주교(원주교구장)는 긴급조치위반으로 교도소에 가기도한 인물이다. 평남 중화출신인 그는 85. 9남북이산가족 상봉차 북한을 방문했다.

35년만에 만난 누이는 피골이 상접했고 손은 부르터 있었다. 북에서 고생이 많구나? 남한에서 가지고간 선물을 주자 오빠 천국이 어디 있어요, 여기가 지상천국이지요! 헤어질 때 누이를 부등켜 안고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달님에게 안부를 전하자 울고 또 울었다. 따라서 주교의 눈물은 혈육이 헤어짐은 남북단절과 누이 그 모습은 그의 가슴을 때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성탄절 3일을 앞두고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이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눈물을 흘렸다. 사실 성직자는 웬만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번뇌와 고통이 있어도 가슴속에 흐르는 눈물을 심장으로 흘러내린다. 하지만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앞서와 같이 선교정신과 혈육의 정을 위해 눈물도 흘린다. 국가의 위난과 국민의 갈등 고통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며 내탓이다. 스스로 자책의 눈물을 흘리신다. 사실 나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다. 신문에 추기경께서 고개 숙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따지고 보면 군사정권시절 국민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민주는 철장에 갇혀 자유는 허수아비며 인권은 진흙 속에 갈갈이 뭉개져있었다. 이런 고비마다 경께서는 억압과 고통을 받고 있는 국민들에 희망이 메시지를 주었다. 강경한 정책에 대해서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문명의 정치를 바로 세우도록 했다.

일부 대학생들이 과격한 시위는 융화의 경계를 넘는 선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시위는 해야 한다. 하지만 국민에게 욕먹는 시위는 안된다. 학생이 스승을 때리고 학교기물을 때려 부수는 행위는 아무리 이유가 있는 시위라도 그것은 찬성할 수 없다. 명동성당 앞에서 천막농성을 할때는 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우리가 자유를 호흡하며 살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런 한편에서 귀중한 자유를 낭비하며서 방종하고 의념을 부추기며 생활면에서 근검절약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그늘진 곳에 관심도 희박하지 않는 등 우리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들의 주심에 우뚝 서 나라의 어르신이셨다.
성탄절을 앞두고 그동안 황우석교수연구성과가 고의적 조작으로 평가되자 세계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고 눈물을 흘렸다. 더욱더 마음 아픈 사실은 사립학교법 개정에 개방형 이사제도는 결국 학교와 정부, 교사와 전교조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 등 그 파장은 국가와 국민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제갈량이 출사표를 잊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진정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 했다. 비유하건데 추기경께서 흘린 눈물은 우리들에게 시사(示唆)하는바 크다.

송   순   강 ( 제주시 삼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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