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최영문화의 관광상품화
서귀포 최영문화의 관광상품화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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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1316년에서 1388년까지 살았던 고려의 명장이며 재상으로서 풍채가 괴걸하고 힘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1357년에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가 되어 배 400여척으로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하여 격파하였으며, 1359년 홍건적 4만명의 침입은 물론 1361년에 연이은 홍건적 10만명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또한, 1378년 왜구가 승천부(현재의 풍덕)에 침입하자 이를 이성계, 양백연 등과 함께 막아냈으나, 1388년 조민수, 이성계로 하여금 3만 8,800여명으로 편성시켜 요동정벌에 나선 대군단이 위화도회군을 함으로써 실각하여 그해 12월에 참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러한 최영은 무장으로서 수많은 적의 침입을 격퇴한 인물인데, 그의 신이한 능력이 그가 죽은 이후 우리나라 민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어 무속신의 형태로도 나타나게 된다.

즉, 최영은 경상도 덕구리 마을 서낭당 당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개성 덕물산에서는 장군당이라는 신당으로 모셔지고 있고, 그가 참수당한 경기도 고양지방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는 최영장군신이 산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최영장군은 서귀포시에도 많은 문화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목호의 토벌에 의해서다. 고려는 1374년에 명나라가 요구하는 제주도의 말 2,000필에 대하여 제주도의 호목이 300필만 보내옴으로써 제주도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 때 최영은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가 되어 도병마사 영흥방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5600명을 인솔하여 동년 8월 28일에 명월포에 상륙하게 된다.

제주도에 당도한 최영은 전 제주목사 박윤청을 목호에 보내어 귀순하도록 권유하였으나 목호들은 이를 거절하고 안무사 이하생을 살해하고 대병력을 동원하여 저항함으로 모든 군사를 독전하여 명월촌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름비오름, 검은오름, 새별오름, 서귀포의 예래, 홍로를 거쳐 법환마을 앞 바다에 위치한 범섬으로 도망한 목호들을 전부령 정용으로 하여금 경함 40척으로 범섬 주위를 포위케 하고 스스로 섬에 상륙하여 목호들을 완전 섬멸하게 된다.

최영은 범섬을 공격하기에 앞서 서귀포시 법환마을에 진을 치고 공격에 대비하게 되는데, 현재 막숙, 망다리, 빽빽동산, 병듸왓, 오다리 등 법환마을의 마을지명 대부분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이처럼 서귀포시의 법환마을에는 최영장군과 관련된 유적이 많을 뿐만 아니라 최영장군은 제주도를 100년 동안의 몽고지배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우리나라를 완전히 해방시킨 사람이다.

그러나 서귀포시는 이러한 최영과 관련된 훌륭한 역사적인 소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엮어서 문화관광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는 너무 소홀하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서귀포시는 최영과 관련된 문화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역사와 교육관광의 현장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영문화를 관광상품화하는 방안은 다양하겠지만, 필자는 최영문화관의 조성, 최영해양축제의 개최, 범섬의 역사ㆍ지질관광지로의 개발, 그리고 법화사지, 이중섭미술관, 서복전시관, 법환문화마을을 아우르는 문화관광 클러스트 조성 등을 제시하고 싶다.

서귀포시는 감귤산업과 함께 관광산업을 지역의 중요산업으로 인식하여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에 최영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콘텐츠 중에서 관광상품으로서 경쟁력이 있는 아이디어를 발굴하여 관광상품화를 함으로써 문화의 세기인 21세기에 지역의 경쟁력을 향상시켜 나가야 한다.

고   승   익 ( 제주대 관광경영학과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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