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자락에서
한 해의 끝자락에서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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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해가 간다. 12월의 벼랑 끝에 오로라처럼 펼쳐진 해으름 속으로 2005년, 이 한 해도 가고 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며 지는 해를 떠올리다 보면 밀레의 ‘만종(晩鐘)’이 생각 키운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농부 부부가 황혼이 지기 시작한 전원을 배경으로 삼종기도를 바치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다. 들판에 굳건하게 서 있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마치 대지와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며, 먼 지평선에서 물 들어가는 황혼 빛을 받고 있는 부부의 경건한 자세는 종교적인 감동마저 불러일으킨다.
‘만종’의 원제는 ‘안젤루스(L’Angelus)’, 곧 ‘삼종기도(三鐘祈禱)’다. 가톨릭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수태 고지(受胎告知)를 기념하여 아침·낮·저녁에 올리는 기도, 또는 그 시각에 치는 성당의 종을 말한다. ‘만종’은 그 저녁에 바치는 기도의 모습으로, 멀리 있는 성당에서 치는 삼종 소리마저 들리는 듯 하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니'
 
우리는 지금 하루의 일과를 끝낸 농부가 황혼 빛을 받으며 기도하는 것처럼, 한 해의 저물녘에서 황혼 빛을 받고 서 있다. 다시 가는 한 해, 을유년은 그 긴 그림자를 남기며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 황혼이 지기 시작한 세밑의 한 귀퉁이에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기도할 것인가.
신석정은 서녘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니’라고 기도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고 합니다./(중략)/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정녕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닌가. 언제나 한 해를 마감할 때쯤이면 회한과 아쉬움에 몸을 떨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 상정(人之常情)이지만, 이 한 해도 황혼 속에 메아리처럼 그 긴 그림자를 남기며 가고 있다.
그렇다, 그림자. 그림자는, 융(Carl G. Jung)에 의하면, 의식 가까이 자리 잡은 무의식의 일부를 가리킨다. 장자(莊子)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와 발소리가 싫어 자꾸 달아났다. 그러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발소리가 들리고, 그림자는 여전히 뒤따라 왔다. 그래서 그는 더 빨리 달리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늘로 들어가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주저앉으면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제 한 해의 끝자락에서 돌아서서 당신의 그림자를 보라. 인간은 무엇이며, 또 무엇이 아닌가. 결국 인간은 그림자의 꿈일 뿐인가.
날이 저문다. 다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밀레는 ‘만종’을 통해 경건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밀레의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일 터이다.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밀레는 그림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고 기도하자

이 즈음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뒤를 돌아보자. 고해성사 하듯 성찰(省察)하고 기도를 하자.
나는 내 능력에 맞도록 가정에, 생활 능력에 맞도록 생활했는가? 시간관념에 불충실하고 헛된 시간을 보내며 행동하지는 않았는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칭찬 받기를 원하지는 않았는가? 주어진 일을 아무렇게나 해 치우지는 않았는가? 내 생각, 내 행동만을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중히 여기지는 않았는가? 남의 마음을 상하도록 심하게 말하거나 필요 없이 남에 대한 말을 하지는 않았는가? …….
반성하여 살필수록 자신의 불찰과 잘못이 샘솟듯이 솟아나 나를 괴롭힌다. 지난 한 해도 얼마나 많은 오류와 죄의식 속에서 헤맸는가.
흔히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 한 해도 억겁의 시공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이고 우리의 인생은 짧다. 지금은 밀레의 그 것처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할 때이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 한 해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당신은 저무는 해의 긴 치맛자락을 보았는가. 밀레여!

김   원   민 [편집국장ㆍ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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