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복
행 복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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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릴라’(Shangrila)는 멀고도 아름다운 곳에 있다. 인생의 완성으로 나타나는 그 지상낙원은 아마도 우리들의 마음에 품고 있는 꿈의 원형상징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엘리지움’(Elysium)이라는 낙토가 나온다. 바다 속에 있는 이 낙원에는 눈도, 비도, 폭풍우도 없고 사철 산들바람이 분다. 행복으로 충만한 이 낙원에는 향기로운 과일과 더불어 더없는 즐거움이 가득 차 있다. 본디 신의 자녀들이 살도록 마련했었으나, 나중에 훌륭한 의인들에게도 개방되었다. 파리에 있는 상젤리제가(街)의 엘리제궁(宮)은 그 이름을 여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인생의 목적을 찾으면서 많은 책들이 행복에 대해서 말했다. 이런 책들이 많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행복을 갈망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증거한다. 도원명의 ‘무릉도원’도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행복이란 말에는 무언가 우울한 가락이 있다. 그것을 입에 담을 때, 이미 그것은 도망해 버리고 만다.”(힐티)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금 그 행복을 되찾기 위해 안개 속에 잠겨 있는 미로에서 방향도 모르는 채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 그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흔히 행복과 전혀 다른 것을 행복으로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많은 재물, 이기주의, 욕망의 충족, 힘과 능력의 과시 등등을 행복과 혼동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것들이 과연 행복을 이루어 줄 수 있을까?
연봉이 1억원을 훨씬 넘는 근로자(?)들이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하며 파업이라는 투쟁을 강행한다. 그리고 국민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들은 집단 이기주의에 도취되어 상대방을 말살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재산이 많은 어떤 이들은 손오공의 여의봉을 손에 들었는지, 개발제한지역에 아방궁을 무색케 하는 호화 별장을 짓고 우쭐거린다. 또 지진이나 폭풍이 허물어버린 건축물보다, 인간의 오만과 이기심이 파괴한 자연의 황량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편리하게도 무감각해지고 만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진정 해복을 누릴 수 있었는가?
그러고 보니 행복이란 물질적 조건에서 얻어지는 게 아닌 것 같다. “인간의 최대의 행복은 날마다 덕에 대하여 말을 주고 받는 것”(소크라테스)이란 말도 있지만, 마음에 거칠 것이 없을 때,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행복은 우리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동안에 존재한다. 쉽게 발견되지 않지만 어느 곳에나 있다. 황금으로 살 수는 없지만 언제든지 구할 수는 있다. 행복의 작은 새는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끼기만 하면, 우리의 손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니까 더불어 사는 곳에 행복의 푸른 나무는 자라난다. 진부한 말이지만 행복의 필수 조건은 사랑이다.
이 두 가지는 인간 내부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어서 제대로 가꾸기만 하면 무성하게 자라나고 가지를 드리워 꽃을 피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웃과 더불어 우리는 행복하다. 이웃은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요, 행복의 공동생산자이다. 이웃을 무시하고는 참된 행복을 차지할 수 없다. “남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자기의 행복을 구한다면, 원망이 자기에게 돌아와 마침내 재앙에 빠지게 된다.”(법구경)

김   영   환 < 전 오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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