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色朋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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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계홍 논설위원
  • 승인 200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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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김   계   홍

저개발, 약소국가에는 여러 가지 원인 중 당파싸움으로 나라를 삼킨 역사를 많이 보아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멀게는 이스라엘이 내분으로 십자군전쟁에 패하여 나라를 잃고 2,000년이 지나야 잘못을 깨달아 지금은 작고도 강한 나라가 되었다. 가까이는 전쟁 중에도 당쟁으로 망한 월남이 패망은 너무나 생생하게 우리어른 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우리 삼국역사를 보아도 파벌과 아집, 폐쇄정책 때문에 망했다. 역사드라마를 보아도 분열과 음모가 나라를 망하게 한 내용으로 차있다. 조선조에 나온 사색당파는 국난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나라를 찾은 광복 후의 분열 상을 보면 정당만 50여 개인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다.

6.25동란 중에도 임시정부 수도 부산에서 ‘4사5입’개헌(1952.7.4)을 한 정치망국의 나라이다. 붕당의 효시는 조선조 선조 8년에 궁중을 중심으로 동쪽에 거주한 김효원을 동인으로 서쪽의 심의겸을 서인으로 분당이 시작하면서 동?서인으로 갈렸다.

다시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이 서인에서 노론과 소론이 파생이 되어 사색붕당이 탄생 된 것이다. 이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당쟁사가 이어지고 보다못한 영조임금은 탕평책을 써서 피해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한다.

당파로 인한 피해의 백미는 임진왜란 시 일본에 보낸 통신사의 귀국보고에서 드러난다. 정사인 황윤길은 조총2정을 보이면서 ‘병화가 반드시 올 것’이란 분명한 보고를 햇는데 부사 김성일은 그 반대의 보고를 왕 앞에서 하였다.

부사의 말인즉 당이 서로 달라 같게 보고를 하면 자기 당에 누를 끼칠까 봐서 그랬다는 것이다. 당시 조종은 부사의 말을 신뢰하여 전쟁대비에 개을렀다. 2년 후 정사의 말대로 왜란은 터지고 말았다. 대노한 선조는 부사를 처벌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용서를 받고 김성일은 회개하고 의병을 모집 진주성 싸움에서 순직을 한다.

국익보다 당을 먼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같은 파의 사람이 김성일에게 만일 정사의 말대로 병화가 있게 되면 장차 어찌하려는가? 라고 묻자 ‘나 역시 어찌 왜적이 끝까지 동병(動兵)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정사 말이 지나쳐서 인심이 당황할까 걱정이 되어 그것을 해명했을 뿐‘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정부와 당들은 어찌 하고있는지 묻고 싶다. 이라크 전, 북한의 핵 문제, 대미?대중외교관계 등 말이다. 국론통일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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