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06년도 세계경제 및 미래경제를 예측한 전망이다. 지금은 중국의 1인당 GDP가 1700달러이고 우리는 1만8450달러로 많은 차이가 있으나 2026년이면 지구촌의 모든 선진국을 추월하여 구매력 기준으로 세계1위의 국내총생산(GDP)를 기록 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유사 이래 최고 수준인 세계적 부동산 거품과 2001년 이후 세 배나 오른 국제유가의 유동으로 앞으로 급속한 경기침체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세계화 추세에 너무 무심하게 살아온 것만 같아서 긴장된다.
60년대 필리핀의 경우 1인당 GDP가 180달러이고 우리는 100달러였다. 그러나 요즘은 상황이 바뀌어서 필리핀의 대졸여성들이 우리나라에 가정부로 온다. 또한 한국의 우리 또래 여성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인시신을 거두는 간호사로 독일에 가서 울면서 돈을 벌어 온 것 같이 간호사로도 많이 온다. 요즘 중국 여행을 가 보면 우리 돈의 위력은 대단하다. 유명한 발 마사지라는 것도 한국 돈 2만원만 주면 정성껏 서비스를 해준다. 만일 우리가 변화의 기회를 놓쳐버리면 우리들의 딸, 동생이 중국에 가정부 또는 간호사로 대거 가야할지도 모른다. 발 마사지는 안하겠는가. 이런 개연적(蓋然的)인 세계 환경에 우리는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에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도는 특별자치도 설치 및 제주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제정여부를 놓고 도민 사회가 혼란으로 치닫고 있다. 반대하는 시민이나 단체가 도청앞길에서 천막농성, 개방을 반대하는 기득권계층의 반대 성명, 그리고 공청회의 파행 등을 보면서 그 파행, 그 주장에 대해서 후손들에게 아니면 전체의 제주도민들에게 책임질 수 있는 있는 주장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제주는 시대조류에 따라 변해야 한다. 우리들의 삶의 터전인 제주가 세계화를 목전에 둔 지금,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환경은 우리들에게 보다 높은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변화불감증” “기득권 사수”가 있을 뿐, 실질적인 변화의 조짐은 요원하기만 한 것 같다. 지금 변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 한다고들 하면서 변화에는 목숨을 걸고 반대한다. 자신을 제외하고 남이 먼저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변화는 없다. 나 자신부터 양보하고 나부터 변해야 한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심이 파문이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커져 호수전체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 같이 모든 변화의 원점은 자신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나는 어려우니 너부터 먼저 해라. 이런 방관적인 태도는 안 된다. “나부터 변화” “너부터 변화”는 글자의 점의 하나차이지만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결과는 전부(全部)와 전무(全無)의 차이인 것이다.
다음은 변화의 방향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더 중요하다. 큰 배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저으면 배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필요성은 알면서도 변화가 가져오는 불이익에 저항하는 이기주의의 전형적인 예가 “총론은 찬성” “각론은 반대”다. 즉 개방은 시대의 조류이고 찬성하는데 방법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 도민을 걱정하는 착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변화의 지연에 따른 피해는 자신들의 지지 않고 고스란히 전 도민들과 우리 후손들에게 이전되는 것임에도 후세대의 당사자 의견은 시차라는 함정이 있기 때문에 양쪽(찬성과 반대자)의 모두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사회나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변화의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속도를 조절하는 “변화의 관제탑”으로서 사회 지도층 역할이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이런 때문이다. 그리고 파도가 밀려오듯이 한꺼번에 모든 변화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전 기존질서를 한번의 혁명으로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아무리 실력 있는 산악인도 처음부터 에베레스트를 오르지 않는다. 우리 한라산을 비롯하여 비교적 덜 험한 국내의 산악을 두루 거친 후에야 티베트로 향한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