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설학교인 제주실업전문학교는 시설이 빈약해서 갖춰야 할 교육용 실습 기자재의 확보나 교수요원 확보, 또는 중앙부처와 교섭하여 학생의 증원과 증과를 허가받는 일, 어려운 학교재정을 해결해야 하는 일 등 산적한 과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1977년 12월 30일자로 보육과와 전자과2부가 신설 허가가 나고, 건축과 40명, 토목과 40명, 전기과 40명, 전자과 40명 등, 모두 160명을 증원 받게 되었다.
또한 1979년 11월 9일에는 공업경영과, 관광과, 가정과에 각 40명씩 120명과 공업경영과 2부 40명, 관광과 40명 증원인가를 중앙에 교섭해서 입학정원은 920명으로 늘리고 보니 당장 강의실 부족현상을 맞게 된다.
그러나 강의실을 증축할 자금이 없는 상황이고 기존시설을 늘릴 방법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궁여지책으로 사무실을 강의실로 내주고 본관건물 중앙에 있는 4층까지 연결된 화장실을 없애서 사무실로 꾸며 일처리를 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도 빚을 얻어 제주시 연평동 현재 대학부지 5만 6천평을 주식회사 삼미 엔지니어링으로부터 사들여 대학 승격을 대비한 캠퍼스건설 구상에 들어간다.
1979년 3월 제주실업전문학교는 제주전문대학으로 승격되게 된다.
대통령령에 따라 교육법이 개정되어 전국 120개 전문학교가 한꺼번에 전문대학으로 승격된 것이다.
학생들도 전문학교 학생이 아니라 전문대학 학생이 되어 어깨가 으쓱해졌고 교장도 대학장이 되었으니 모두가 격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기쁨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강석범 교장도 학장이 되는 날 오랜 투병에 시달린 모습을 애써 감추며 대학의 밝은 미래상을 이야기하였지만 어눌하게 들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로 병세가 깊었다.
대학승격 5개월 만인 1979년 8월 5일 63세를 일기로 대학설립자인 강석범 선생은 타계하고 위대한 교육자로서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삼의캠퍼스 준공과 삼의벌 시대의 개막
대학으로 승격이후 대학이설을 위한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 결과 캠퍼스가 모두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1981년 10월 17일 1,486평의 웅장한 4층 슬라브 건축물이 삼의벌 넓다란 초원에 우뚝 선 것이다.
적어도 이 건물 하나만 완공된 것으로서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당장 제주시 용담동 캠퍼스에서 제주상고와 섞여 살지는 않아도 되는 살판나는 교육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완공을 목 타게 기다린 까닭에 학기 중간이었지만 무조건 옮기기로 했다.
1981년 10월 17일 이설 준공식이 화려하게 베풀어지고 학원 식구들이나 학생들도 정말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준공을 자축하고 기뻐하였다.
당시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너무 급하게 이설을 서두르다보니 부대시설이 완성되지 못해 수도공급도 시원찮고 일반전기도 끌어 드리지 못해 야간수업은 발전기를 돌리는 상태지만 그게 문제가 안 되었다.
구내식당도 진입로도 엉망인 상태에서, 누구 눈치 안보고 편안한 마음으로 교실에 앉아서 수업 받을 수 있는 환경만이라도 조성된 것이 너무도 기뻐서 교수이고 학생이고 간에 자기의 집을 지은 것처럼 행복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서 2호 별관 공사가 착공되고 착공 후 1년도 안된 1982년 9월 1,200평의 멋진 현대식 슬라브 건물로 준공되어 허허벌판에 외롭게 섰던 본관과 마주봄으로 제법 대학의 모습이 갖춰져 간다는 인식을 도민과 학생들에게 충분히 심어줄 수가 있었다.
이 때부터 대학간의 유대를 넓혀나가기 시작했고 정보문화교류를 폭넓게 한다는 의미로 육지부 대학과 자매결연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1981년 11월 23일에는 서울에 있는 명지실업전문대학과 자매결연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학교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강정민 이사장이 명지대학을 졸업한 인연 때문이다.
뒤이어 1982년 1월에는 미국 코네티카트 주립대학과 자매결연을 체결 하였는데 이것은 북제주군 애월읍 출신 고광림박사가 당시 이 학교에 종신교수로 봉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결이 된 것이다.
이처럼 외국대학이나 국내 대학간 자매결연에 따라 이런 저런 학교소식이 도민사회에 알려지면서 제주전문대학은 정상궤도를 순탄하게 달리는 것으로 일단 도민들에게는 믿음을 주게 된 것이다.
▲학원부도 발생과 학내 진통
제주전문대학은 학교 이설공사를 하면서 자금압박에 시달려왔다. 자금압박에 몸부림치다 3호관 골조공사 마지막 부분인 옥탑에 시멘트 타설공사를 막 진행하던 1984년 10월 6일 느닷없는 명륜학원 부도뉴스로 나타난다.
자그마치 100억원대가 넘는 엄청난 부도사태였던 것이다. 명륜학원 부도사태의 전말은 출범때부터 빈약한 자산으로 출발이 문제였다. 강정민 이사장이 설립자 고 강석범옹으로부터 재단을 인수받을 당시 일부 부채를 안고 있었으나 학교시설자금이 부족하여 사채 등 무리하게 돈을 끌어 쓴 결과였다.
부도사태 발생이후 학원의 정상화를 위해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학원의 정상화를 위한 수습대책을 위해 몸부림을 치게 된다.
대학이 표류한지 2년이 지나가자 채권단의 아우성도 잦아들고 실의에 빠진 채 주저앉게 되었고 학원 수습문제도 별다른 진전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무렵 본도의 현경대 의원의 중재로, 재력가로 알려진 대구에 있는 신기학원을 운영하는 신진수(당시 국회의원)씨와 학원관계자들과의 상당한 접촉을 벌려 천신만고 끝에 학원인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게 된다.
신기학원이 제주전문대학을 인수한 시기는 1987년 9월부터 1990년 2월까지로 대략 2년 반 가량의 시기로, 명륜학원에서 동원학원으로 이어지는 중간 매개역활을 한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기학원은 인수한 대학의 부채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학교시설의 집중적 투자가 요구되는 시점이었으나 시설 투자에도 미온적이어서 교육환경개선 노력은 실천보다는 구호로 그친 경우가 허다했다.
강 선 종 (전 탐라대교수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