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7년부터 말 1500여필 국가에 바쳐
선조 27년부터 말 1500여필 국가에 바쳐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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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마공신ㆍ오위도총무 부총관(종 2품)직 제수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은  조선 영조 때의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동복리에서 태어 났으며 여류 자선가 이다.
본은 김해 김 씨요 곧 탐라의 좋은 집안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독하게 가난과 고생으로 자랐다. 그러나 살결이 곱고 아름다우므로 교방(敎坊)에 의탁한 바 되었으나 의복을 줄이고 먹을 것을 먹지 아니하여 재산이 대단히 커졌다.
정조14년(1790)부터 정조18년(1794)까지 5년간 제주지방에 흉년이 들어 제주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그녀는 1천금을 내놓아 곡식을 육지에서 운반하여다가 심히 많은 백성의 목숨을 살렸다.

목사가 이 착한 사실을 아뢰니 임금께서 무엇이 소원이냐고 물으셨는데 대답하기를 “화려한 서울과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므로 특명으로 고을과 고을을 이어가며 돌아보게 하고 내의원(內醫院) 의녀로 삼아 여러 차례 은총(恩寵)을 내리시고 포마(鋪馬)를 내려주어 일만이천봉을 두루 유람하고 급기야 서울로 돌아오니 이로 인하여 공경대부(公卿大夫) 모두가 글과 전기를 써주었다.
(김봉욱. 구원의 여상 김만덕. 제주도 1989)

Ⅲ. 제주도 목마장의 변천( 6 )

■ 제주도의 사목장(私牧場; 개인목장)

조선시대 태종 15년(1415)에 사목장에서 사육하는 말에 낙인(烙印)을 찍고 매매한 것으로 보아 과거 제주도에는 사둔장(私屯場: 字牧場)이라 불리던 사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사둔장은 개인이 목장을 설치하여 경영한 것으로 생산된 말은 국가에 등록하고 매매처분 등에 통제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준마(駿馬)의 가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목자의 3배, 면포50필, 쌀20석(石)에 해당할 정도로 높은 값이어서 제주목사나 현감 또는 군관이나 중앙에서 온 관리들 중에는 개인목장과 김만일(金萬鎰) 목장의 말 중 준마(駿馬)를 빼앗아 중앙관리들에게 뇌물로 또는 부(富)를 축적하는 횡포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제주마의 값은 전라도 나주(羅州)에서는 산지(産地)에서 보다 한 곱이 더되고 한성(漢城) 등 다른 지방에서는 다시 한 곱이 되어 제주에서 보다 4배가 되었다고 하니 현재 값으로 계산하면 국내산 최고급 승용차 값과 같다고 할 정도이다.
숙종 30년(1704) 이형상 목사는 남환박물에 국둔마(國屯馬)의 반쯤은 개인목장으로 들어가서 국마(國馬) 사육이 7.600여 필로 기록되어 있다.

김만일목장

김만일(金萬鎰, 1550~1632)은 濟州入道始祖 훈련원도감 휘 검용(儉龍)공의 7세손이고,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조15년경 방답진(순천부)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제수되어 벼슬을 한 후 고향에 돌아와 마(馬)번식과 개량에 힘써 준마(駿馬)를 많이 사육하게 되어, 임진왜란으로 말이 징발되고 유실되어 국영목장이 황폐화되자, 종전(終戰) 직후인 선조 27년(1594)에 자진하여 전마(戰馬) 500필을 국가에 헌납하였는데 조정(朝廷)은 이를 계기로 10소장 내에 동·서별목장을 설치하여 김만일에게 관리토록 하였다.

광해군 12년(1620)에 戰馬 500필 헌마하여 헌마공신(獻馬貢臣)의 호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직과 큰아들 대명(大鳴)은 수령(守令), 둘째아들 대성(大聲)은 당상관(堂上官), 손자 려(礪)는 변장(邊將)을 제수 받았으며 그 후 손자는 선전관(宣傳官)을 겸직케 하였다.
그의 조부, 아버지는 참판(參判), 참의(參議)에 추존(追尊) 되었으며 인조6년 (1629)에도 김만일목장에서 전마(戰馬) 4~5백 필을 징마(徵馬)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종1품)를 제수 받았다. 따라서 당시 김만일은 제주사람으로서 가장 높은 벼슬을 받았다.

또한 효종 9년(1658)에는 그의 셋째아들 대길(大吉)과 손자 려(礪)가 전마(戰馬) 208필을 다시 국가에 바치자, 왕은 목사(牧使)의 건의를 받아 들여 동서별목장(정의현 10소장내에 있는 목장; 남영목장쪽)을 산장으로 만들어 말을 목양(牧養)케 하였다. 그리고 말을 바친 공로를 인정, ‘산장감목관’ 직을 신설하여 그의 아들 김대길을 감목관에 임명하고 그 후손(後孫)으로 하여금 세습(世襲)케 하였다.

김만일은 국왕의 명령에 응하여 여러 차례 제주마 수백 필씩 헌마(獻馬)하여 역대의 제주사람으로서 가장 높은 벼슬을 받았으며 경제적 지위를 사회적 ·정치적 지위로 본인뿐만 아니라 아들, 손자 그리고 경주김씨 후손들이 산마장 감목관직(종 6품)을 세습케하여 제주도에서는 오랫동안 지배층으로 사회적 위세는 대단하였으며 또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됨으로서 경제적 가치를 유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이 된다.

 김만일이 많은 말을 소유하게 된 과정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밝히는 것은 어렵지만 당시 가장 많은 말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김만일이 제주도에서 가장 많은 말을 소유하게 된 것은 결코 그 이전의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많은 말을 사육하고 헌마한 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지만 김만일 사목장(私牧場)에서 사육된 말은 여러 사료(史料)에 수천~일만 여 필(匹) 이나 당시 제주도의 전체목장에서 마사육 필수는 1~2만 여 필이 되며 그 후 숙종28년(1702) 耽羅巡歷圖의 산장구마(山場驅馬)에 기록된 2.375匹 등을 종합하면 3~5천 여 필 정도를 사육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광해군 10년 점마관 양시헌(梁時獻)을 파견하여 전마(戰馬) 수 천 필을 공마케 하는 과정에서 김만일과 아들 3명을 무거운 형을 가하고 반출이 금지된 암말 수 천 필을 수탈하려다 물의가 일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왕은 양시헌을 파직하고 그해 수말 1~2백 필만 점점하여 공마토록 하였다.
인조때 이건(李健: 宣祖의 손자) 濟州風土記에 김만일(金萬鎰)의 말은 수 천 필이나 되어 확인하기 어렵고(至數千匹不可紀數) 새로운 관리(新官)가 입거할 때 마다 체임진상마(遞任進上馬)를 김만일로부터 징(徵)하여 3년 간 소중히 사양하고 습재(習才)하였다가 체귀시에 진헌(進獻)하였다.

김만일의 말이 많다고 하더라도 혹 진상에 합당한 것이 없을 때에는 관가에서 말이 있는 집의 가동을 가두어 징삭(徵索) 하였고 이렇게 해서도 얻지 못하면 편복에 따라 그 처(妻)를 가두고 그 자식을 장(杖)하는 등 無所不至의 방법으로 하였다. 더구나 탐관오리는 진상을 빙자하여 많은 말을 징(徵)하여 사용(私用)으로 삼아버리며 또한 馬屯(말 무리)에 다소 좋은 말이 있으면 삼  읍의 원님들이 다투어 탈취하므로 준(駿)한 말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김만일은 말의 절종(絶種)을 걱정하여 성장하여 준마가 될 말에 일부러 눈에 상처를 내어 맹목(盲目)이 되게 하거나 피부와 귀를 째어서 흠이 있는 말로 만들어 잘 보존하였다가 종마로 사용하였다. 김만일은 본 도의 정병(本島正兵也)이였는데 그는 젊었을 때 자마(雌馬: 암말) 2필을 얻어서 旌義境(정의현지경)에 방목하여 그 말들이 새끼를 많이 낳고 암말들은 모두 2세(二禾)에 임신하면 모두 보통 말(駿異)을 낳으므로 수년 내에 많이 번식하여 수백 필에 이르렀고 점차 지금 상태로 이른 것이다.

그는 말을 헌납한 공으로 관이 부총관에 이르고 나이는 80에 죽었다고 한다(納馬有功 官至副摠管 年至八十而死云).
 김만일목장에 대한 몇 가지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다음의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이다.
김만일의 처는 강씨인데 강씨 집안은 상당히 재력이 있었지만 양반들로부터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만일은 양반집안 출신이기는 했지만 매우 가난하고 아무런 재산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강씨 집안에 장가들면서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수말(種馬) 한 마리를 목장에 놓아기르는데 하루는 이 말이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은 말을 찾기 위해 동고량(차롱)에 점심을 싸들고 목장에가 보았더니 의외에도 이 수말이 일 백여 마리의 암말을 거느리고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살펴보니 그 말들은 전부 처가의 것이었다. 사위는 곧 처가에 연락하여 이 말떼를 다 몰아가게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이 수말이 또 다시 그 말떼를 전부 거느리고 돌아왔다. 몰아 가면 말떼를 이끌어 가고 오고를 수십 번 하다보니 처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 말떼들을 전부 가져 버리도록 하였다. 그래서 김씨댁은 일약 부자가 되었다. 이 말이 새끼를 낳고 또 새끼를 낳아 수년 내에 말은 수백 필이 되었다. 말이 크게 불어나자 김씨는 말 5백 필을 나라에 바쳤다.

 또 다른 이야기는 정의현 의귀리에서 태어난 그는 젊었을 때 암말 2필을 얻어 산야에 방목하여 수년 만에 수천 필을 번식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국가의 요청에 따라 계속 말을 헌마하였다.
 지금은 헌마공신 김만일 17손인 김두봉(남원읍 의귀리, 50세)이 의귀리 마을공동목장(녹산장)에서 마 20여필과 소 150두를 중잣성과 하잣성을 목책으로하여 사육하고 있다.
김하정(金夏鼎)목장은 영조 12년에 사마(私馬) 200필을 국가에 바쳐 금군(禁軍)·훈군(訓軍)·어영군(御營軍)에 나누어 지급되었다고 하나 이외 제주도에는 많은 개인목장이 있었으나 조정의 통제를 받아 마둔장(馬屯場;字牧場)으로 번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31) 기타목장으로 계속)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제주마문화연구소장ㆍ제주도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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