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이육사) 식탁은 또하나의 축제가 이루어지는 제단이며, 사랑과 화해의 용광로이다. 식탁에서 피어나는 삶의 향연은 모든 연령, 모든 신분, 모든 지역에 공통된다. 식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그대로 전인생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인생의 가장 사소한 일들과 가장 빛나는 희망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와 수저를 든 손동작은 어쩌면 조물주가 허락한 즐거움의 극치일는지 모른다.
바로 거기에 삶의 환희가 냇물처럼 흘러 넘치기 때문이다.
어떤 염세적 결정론자도 식탁에서만은 의지의 자유에서 낙관론의 신봉자가 된다. 우리가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는 것은 식탁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선물이다. 대리석 바닥과 금빛으로 도금한 벽이 식탁을 꾸미는 게 아니다. 사랑과 친교가 모든 음식물에 으뜸되는 조미료인 것이다.
우리의 식탁에 빠질 수 없는 메뉴의 하나로 김치가 있다.
묵은지라고 해서 몇 년을 숙성시킨 김치가 입안에서 펼쳐놓는 오묘한 맛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것인가?
갓 담근 김치의 맛도 결코 이에서 뒤지지 않는다. 고춧가루와 여러 가지 양념으로 벌겋게 버무린 배추 밑동을 어적어적 씹어먹는 맛이란 김장철의 으뜸이다. 지금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김장철’이란 말이 사라져 버렸지만, 이 말이 우리네 살림살이를 지배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김장철이 되면 모든 가장에서는 김치를 담그는 행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것은 한 집안의 일에 머물지 않았다. 동네에서 주부들끼리 수눌음으로 돌아가며 이웃집과 김치 담그는 일을 함께 했다.
어린 아이들이 매운 입을 다물지도 못하면서 연성 무쪽을 달라고 보채는 것도 이철이요, 주머니와 의논을 해서 값을 덜 들이고 많이 담그는 솜씨를 발휘하는 것도 이 철이다.
날씨와 타협을 하면서 시지 않고 알맞은 맛을 내게 하는 재주는 숙련만으론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론으로는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기막힌 솜씨가 온몸으로 체득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김장철에 주부들은 이웃이나 친지를 만나면 김장을 담갔느냐고 묻는 게 제일의 인사였다.
김장철의 이러한 풍속은 가정사만이 아니었다. 많은 회사가 사원들에게 소위 김장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고, 모든 보도 기관은 올해 김치 담그는 데에 필요한 액수를 세밀히 계산하고 연일 보도하였다.
그러나 역시 김장철의 주역은 주부들의 담당이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그들의 정신적 고뇌와 재료를 구입하는 일, 그리고 육체적 노고가 양념으로 스며들어 우리의 식탁은 풍요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더불어 우리 가정은 즐거웠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처럼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다.”(울프)
이제 김장철이란 풍속은 사라졌다. 물론 그에 따르는 어머니들의 고된 노역도 없어졌다.
돈만 가지고 마트에 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입할 수 있다. 참으로 편리한 삶이 되었지만, 따뜻한 사랑과 끈끈한 정마저 소멸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것이다.
최근에는 공장에서 제조한 김치에 유해 요소와 기생충 알이 함유되어 있다고 밝혀져서 세상이 온통 떠들석하다. 우리의 식탁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될 김치마저 생명을 위협하는 모습으로 둔갑하고야 말았는가?
황금과 물질만능, 그리고 이기주의에 젖어버린 우리들의 오만과 어리석음이 생명과 사랑의 문화로 치유되어 갈 때, 우리는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김 영 환 (전 오현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