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뜨르 격납고 활용 문화행사 이어지기를
알뜨르 격납고 활용 문화행사 이어지기를
  • 김응용 알뜨르프로젝트 운영감독
  • 승인 2018.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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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건설 원형 19기 최대 규모
농기구창고 방치된 유적 지난해 정비
제주비엔날레 일환 야외 전시 행사

격납고 가치 알려져 호응 기대 이상
임시프로젝트 오는 추계 전시로 마지막
지자체서 관리하고 행사 계속됐으면

 

대정 마을 알뜨르에는 19기의 격납고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지난해 ‘2017제주국제비엔날레’의 일환으로 알뜨르 격납고 야외 전시를 위해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이곳은 농기구를 보관하거나 쓰레기를 모아두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정비가 불가피했다. 각각의 농기구들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장정 대여섯이 동원되어 며칠에 걸쳐 쓰레기를 치우고 정비했다. 그 후 전시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이 유적의 가치가 주변에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문화재단의 문화재관리팀이 제초 작업도 주기적으로 하며 관리하고 있다.

이런 격납고들은 2차대전 말기 전폭기의 폭탄 공격으로부터 전투기를 보호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제주뿐만 아니라 밀양, 영천, 사천, 김해 등지에도 서너 기씩 남아 보존 또는 방치되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 및 동남아 등지 곳곳에도 몇 기씩 남아 있고 대만에는 8기가 군사보호구역 내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된 상태에서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알뜨르와 같이 대규모(19기)의 격납고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곳은 없다.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지도 않은 알뜨르에서 어떻게 격납고들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일까. ‘대정읍지’에 기록된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처음에는 25기를 만들어 4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고 21기가 유지됐었다고 한다. 지금은 원형이 보존된 19기와 철거되어 시멘트더미로 있는 1기를 포함해 총 20기만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이 격납고들은 철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에 의하면 해방 후 철근이 부족해 주민들이 철근을 빼내기 위해 격납고 파손을 시작했고, 무척 견고하게 만들어진 격납고 시멘트 구조물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철근을 정과 망치로 쳐서 빼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0년쯤 대정읍사무소를 지을 때 토건회사에서 장비를 동원해 격납고 철거를 추진했으나 생각보다 철근이 나오지 않아 1기만 시도되고 멈추었다고 한다. 현재 시멘트더미로 남아있는 1기는 이 때 철거가 시도된 것이다.

격납고를 살펴보면 건축 양식에 관한 것도 얘깃거리가 된다. 격납고 축조 과정은 당시에는 생소한 재료인 시멘트를 사용하는 공법으로 첨단 건축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대정읍지에는 축조 과정에 참여했던 강필봉 씨의 인터뷰 내용이 있다.

“16세 때부터 목수일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상모리 절왓에 일본군 대촌병사 건물을 20세 때(1940년) 1년간 12동을 지었어. (중략) 알뜨르에 가서는 격납고 만드는 일을 하였고... (중략) 격납고 만들 때는 우리가 널빤지 대여섯 개를 쭉 이어서 가다(모형)를 짜 놓으면 보급대에서 철근하고 공구리(콘크리트 작업)를 한 다음에 가다를 뜯어서 딴 데로 가져가 쓰니까 격납고 크기는 모두 다 규격이 똑같아.”

이 글을 읽고 상상되는 것은 널빤지로 아치형 모형을 짠 후 아래에 기둥을 세워 올리고 위에 시멘트를 붓는 작업이다. 이것은 지금도 거푸집 위에 콘크리트 작업을 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한 번에 콘크리트 작업을 한다면 기둥이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김해공항 근처에 살며 가까이에서 격납고를 보고 들었다는 한 어르신으로부터 해답을 얻었다. 기둥을 세우는 게 아니라 흙을 채웠다는 이야기다. 먼저 흙을 채워 봉분을 만든 후 판자로 짠 모형을 올리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붓고 굳으면 흙을 걷어내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 후 자세히 살펴보니 격납고 아치형 양끝은 판자를 댄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흙으로 쌓은 방법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6일부터는 ‘알뜨르 프로젝트2018’의 추계 전시가 시작된다. 작년 비엔날레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가 반향을 일으켜 추가로 진행된 사실상 임시 프로젝트 행사는 이것으로 막을 내린다.

차후에 알뜨르에서 이 같은 행사가 더 이어질지 확신하기 어렵다. 다소 열악한 환경에서 진행된 전시였지만 관객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알뜨르가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자못 크다. 앞으로 지자체 단위에서 이 유적을 꾸준히 관리하고, 전시 등 다양한 행사도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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