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산장구마(山場驅馬)
탐라순력도의 산장구마(山場驅馬)는 숙종 28년(1702) 10월 15일(음력) 이형상목사가 중군제주판관을 대동하고 감목관 김진혁(金振爀), 정의현감인 박상하(朴尙夏)와 함께 마필(馬匹)을 성불오름쪽(현재 구좌읍 대천동)등에서 동원된 인원은 결책군(結柵軍, 사장과 목책을 만드는 군인) 2,602명, 구마군(駒馬軍, 말을 모는 임무를 맡은 군인) 3,720명, 목자(牧子, 말의 직접적인 관리자)와 보인(保人, 목자의 경제적 기반의 일부를 제공하는 사람) 214명이 동원되어 말 2,375필(匹)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성판악 남쪽에서 벌어진 구마(驅馬)는 남북 약 40리, 동서 약 60~70리의 넓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목책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녹산장(鹿山場), 상장(上場), 침장(針場)으로 생각되나 1780년 김영수 목사 때 쌓은 횡장과 교래리를 감싸고 흐르는 천미천을 기준하여 구분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각 구역마다 말을 취합하는데 필요한 사장과 원장이 설치되어 있다. 원장(圓場)은 말을 취압하기 위해 만든 원형목책이고, 사장(蛇場)은 취합한 말을 1두, 또는 1필씩 통과할 수 있게 만든 좁은 목책 통과경로이다.
원장은 다시 미원장(尾圓場)과 두원장(頭圓場)으로 구분되며, 그 중간을 연결하는 것으로 사장이 있다. 말을 먼저 미원장에 몰아놓고, 사장을 통해서 점검한 뒤에 두원장에 취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장은 말의 수를 파악하는데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진상 혹은 다른 목장으로 마를 보내기 위하여 하나씩 붙들 수 있게 된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보면 교래대렵과 달리 오름이 많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라좌록과 성판악을 중심으로 사라오름, 불칸디오름, 쌀손장오름, 물장올, 견월악, 돔배오름, 대천이오름, 민오름,거친오름, 산굼부리 바농오름, 지그리오름, 까끄래기오름과 넙거리오름, 물찻, 말찻, 버널오름, 민오름 물영아리, 여문영아리, 대록산, 소록산, 검은오름, 구두리오름 등이 그 위치가 아주 다른 곳에 표시되어 있다.
산마장의 사무소가 있는 교래리에서 북쪽의 목책지역은 현재 대원목장, 제주도돌문화공원, 교래리 공동목장, 제주승마장 지역인 침장이다.
중간 목책지역은 현 제동목장, 정석비행장, 한국마사회육성목장인 상장, 녹산장이며 미원장과 사장은 성불오름쪽이나 남영목장, 성읍 2리쪽으로 보이며 구두리악, 검은악은 위치가 잘못 표기된 것이다(제주목과 정의현경계가 표시됨).
남쪽 목책지역은 물영아리악, 여문영아리악, 의귀리하천, 대록산, 소록산 등 표기로 보아 남원읍과 표선면에 위치한 상장, 녹산장(갑마장)이다.
숙종 30년 (1704)에 이형상 전 목사가 쓴 남환박물(南宦搏物)의 마소(誌馬牛)조에 산마장의 말(山馬)은 체질과 품성을 보면 도망치는 말이 대단히 많으나, 몸집이 크고 준골(駿骨)인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성질이 거칠고 4~5길(丈)이나 되는 큰 나무들을 묶어 목장을 에 둘렀고 5천이나 되는 군졸들이 포위하여 말들을 몰았으나 무너 뜨리고 다섯 길(丈)이나 되는 목책을 뛰어 넘었다.
여러 차래 말들을 몰아넣었지만 끝내 낙인(烙印)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마왕(馬王), 용종(龍種), 비마(飛馬)라고 불렀다.
현재 원장과 사장의 모양인 나무나 철근으로 된 것을 흔히 목장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기업목장, 마을공동목장에서 여름철 진드기 구제장이고, 육지부에서 고기잡이 죽방렴 (경남, 남해)방법이라고 하며, 아프리카 평원에서 야생동물의 떼를 안전하게 대량 포획할 때 헬리콥터(helicopter)와 안전요원 및 수의사가 동원되어 원장과 사장으로 몰아오는 방법을 Boma Capture라고 한다.
(5) 교래대렵(橋來大獵)
교래대렵(橋來大獵)은 1702년(숙종28)10월 11일에 제주판관, 정의현감과 대정현감과 산마장의 김진혁 감목관이 참여하고 남원과 표선 지경인 대록산, 소록산 그리고 흑악(검은오름), 여문영아리오름, 따라비오름 등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상장과 녹산장(갑목장)으로 생각되며 임금님께 진상을 위한 산짐승과 날짐승을 사냥하는 그림이다. 현재 정석비행장, 제동목장, 가시리 공동목장, 토산 공동목장 지역이다.
당시 제주의 산짐승은 주로 노루, 사슴, 돼지, 오소리 등과 날짐승으로 꿩, 까마귀, 솔개, 참새 등이고 황새, 까치 등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일 사냥에 참여한 관원은 제주목사, 정의현감, 대정현감과 감목관이며, 사냥에 동원된 인원은 기마(騎馬)했을 때 말안장에서 흔들림이 없는 제마(측대보, 제주마 특징)를 타고 사냥하는 마군 200명, 걸어서 짐승을 일정한 장소로 모는 보졸 400여명, 포수 120명이다.
사냥물은 사슴 177마리(口), 멧돼지 11마리(口), 노루 101마리(口), 꿩 22마리(首)이다. 이때 생포한 사슴은 이듬해(1703년) 4월 28일 비양도에 방사(放飼)하였다(飛揚放鹿).
효종4년(1654)이원진목사의 탐라지 공헌(貢獻)편에 사슴가죽, 사슴꼬리, 사슴혀, 사슴건포 등을 진상한 것으로 보아 제주도에 사슴이 많이 서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래대렵 시 마취제를 칠한 화살촉으로 사슴을 생포하여 일정한 장소에서 사육한 후 비양도에 방사한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노루, 오소리, 꿩, 까치, 까마귀, 산비둘기, 참새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수렵도(중국 길림성 집안현) 무용총의 사냥모습과 비슷하다.
(30-제주도의 사목장에서 계속)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ㆍ제저마문화연구소장ㆍ제주도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