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북녘으로 돌아가더라도 남녘 동포들 고무, 찬양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북녘동포들을 고무, 찬양해 주십시오. 그래서 더 이상 북·남간의 오해와 불신 대결과 대립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시대를 과감히 마감해야 합니다.” 2002년 8월 26일 비전향 장기수 범국민환송식에서 송환 비전향 장기수들이 발표한 성명서 일부이다. 물론 북으로 돌아간 비전향 장기수들은 남파 공작원과 의용군·인민군·빨치산 출신들이다. 대부분은 북쪽에 가족이 있으며, 남쪽 출신으로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들도 끼여있었다. 제주출신 비전향 장기수 고성화(90)씨는 지금 2차 송환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는 최근 ‘통일의 한길에서’ 라는 회상기도 펴냈다.
비전향 장기수, 과연 어떤 사람들을 일컫는가? 미전향 장기수, 출소 공상주의자 등 다양하게 불리우는 비전향 장기수는 국가보안법·반공법·사회안전법 등으로 인해 7년 이상의 형을 복역하면서도 사상을 전향하지 않은 장기수를 말한다. 해방 이후의 남파 간첩이나 빨치산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당시 재판을 받고 복역한 뒤 1960년대를 전후하여 풀려났다가 1975년 사회안전법이 제정되면서 재수감 되어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 생활을 했고, 사상전향서 제도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지면서 대부분 석방되었다.
“흘러간 물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수 없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는 고성화씨의 ‘통일의 한길에서’의 고백처럼, 그는 오직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로 일생을 살아왔다. 그는 식민지 시대, 외세와 분단시대의 민족모순에 맞서 싸워온 사람이다. 나는 그의 회상기를 읽으며, 그의 삶이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규정받고 있음을 보았고, 세계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옳게 인식하고, 창의적이며 목적의식적 의지로 살아왔음을 읽을 수 있었다. 비록 세계관과 가치관이 서로 다르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신념에 따라 치열하게 한 평생을 살았다는 데서 어떤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지금 고성화씨는 북송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1973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후 1993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하기까지 2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0.75평의 독방에 갇혀 벽만 바라보는 생활에서 오직 분단을 극복하고 조국 통일을 위한 일선에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그였다. 그는 북한에는 가보지도 못했고 북한 정권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면서, 그러나 자신이 이념적으로 걸어온 길, 즉 자주와 주체의 길이 옳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우도에서 1916년에 태어났다. 해방과 더불어 조선공산당 우도 책임비서로 활동하였으며, 1947년 미군탄압으로 부산으로 탈출하였다. 부산에서도 부산시당 책임비서로 활동하다 피검 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출소하였으며, 그후 1973년 다시 피검 되어 20년을 감옥에서 생활하다 1993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였다. 그는 부산에서 활동할 당시도 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전향하지 않았으며. 59년부터 68년 사이에는 국내적으로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고심을 했던 때이고, 조직적으로는 연결이 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여러 일을 계속하였다.
고성화씨, 그는 지금 민족화해와 단결의 시대, 조국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 나가는데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모든 것을 통일조국에 바치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어, 그를 생각하는 나 자신이 마음 한편이 쓸쓸함을 느낀다.
김 관 후 (북제주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