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른 밭 한 가운데 산재한 이질적인
시멘트 축조물들 처음 본 순간 충격적
日 제국주의가 남긴 비행기 격납고
방치된 유적은 잊혀진 역사와 같아
비엔날레 이어 올해 예술작품 전시 계속
미래세대 산교육장 적극 활용 필요
제주 서남쪽 대정(大靜) 마을에 ‘아래쪽 너른 들판’이라는 뜻의 알뜨르가 있다. 척박한 제주 땅에서 너른 들이 있는 지역은 농사로 생활이 가능했으니 그 중에서도 특히 대정은 알뜨르가 있어 윤택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런 부유하고 아름다운 대정에는 어울리지 않게 오랜 시간 방치된 시멘트 축조물들이 남아있다. 나는 지난해 이것들을 마주했던 처음 순간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농사가 한창인 너른 밭들 한 가운데 이토록 이질적인 것들이 어떻게 남아있게 됐을까? 이들의 용도는 무엇이었고 어떤 배경과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알아보니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해군에 의해 비행장으로 개발되었고, 시멘트 축조물들은 당시 비행기를 격납하기 위해 특수하게 짜여진 벙커, 또는 격납고라고 했다.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는 격납고들의 실태와 남겨지게 된 배경을 따라가다 보니 생각보다 중대한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실들이 줄줄이 따라 나왔다. 그리고 이것이 남겨져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가 가진 유산에 관한 중요한 의미와 질문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일본은 청일전쟁(1895)과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를 거둔 후 대만과 만주, 한반도의 지배권을 차지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든다. 1920년대 중반 군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 일본은 동북아로의 확장 야심과 전의에 불타올랐다. 알뜨르의 군용비행장 건설 시기가 바로 이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 전투기의 항속거리는 1200km 정도. 일본 해군이 있는 나가사끼 공항에서 중국 상하이까지 거리가 900km 정도이니, 중간 기착 공항이 필요했고, 제주도가 최적의 위치라고 판단됐을 것으로 보인다.
1926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알뜨르비행장은 1937년쯤 1차 완공된다. 이 무렵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일본은 나가사끼에 있던 오오무라해군항공대를 알뜨르비행장으로 이동시켜 상하이와 난징을 본격적으로 폭격하기 시작했다. 상하이를 차지한 일본은 알뜨르의 오오무라해군항공대를 상하이로 옮기고 알뜨르를 연습비행장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에 1945년 초 태평양 전쟁 말기 ‘결7호작전’이라는 일본 본토 방어 작전에 제주도가 편입되었다. 이 때 미군 b-29폭격기에 대항해 일본의 전투기 보호를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들이다. 현재 제주의 오름들 곳곳에 남아있는 진지 동굴들도 이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같은 배경을 알아야만 제주도 대정에 왜 일본의 비행장이 필요했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다. 현재 알뜨르에는 19개의 격납고와 지하벙커 그리고 2km에 달하는 활주로터, 제1육군 훈련소 때 시설들, 중공군포로 수용소 흔적 등 이 땅이 겪어온 전쟁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알뜨르 비행장과 이 곳에 얽힌 전쟁사를 알리고자 작년에 제주도립미술관 주최로 열린 ‘제주국제비엔날레’에서 8개 격납고 안에 작품을 설치하고 전시했다. 예상외로 뜨거운 호응을 얻어 올해도 ‘알뜨르프로젝트’로 규모를 약간 축소해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격납고 전시를 하는 동안 각계각층, 여러 나라 사람들로부터 다양하고 흥미로운 반응들을 얻을 수 있었다. 나라와 세대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활발한 토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곳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20세기에 일어난 동북아의 모든 전쟁과 초기 비행기의 발달사를 엿볼 수 있고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뜻 깊은 장이다.
알뜨르는 역사를 되새기고 미래세대에 산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작년과 올해 이어온 이러한 전시 형태는 자칫 엄숙하고 어렵게 다가오는 역사에 대해 친숙하고 쉽게 이야기의 물꼬를 트게 하는 생각보다 큰 효과가 있었다. 알뜨르 관련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다만, 알뜨르는 현재 국방부 소유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에 많은 제약이 있다. 속히 이 땅이 원래의 주인인 주민들에게 돌아가고 주변 농가와 밭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다양하게 개발되길 바래본다. 방치된 유적은 잊혀진 역사와 같다.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이 서린 알뜨르에서 예술로 평화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