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마주친 제주의 ‘아픈’ 미래
로마에서 마주친 제주의 ‘아픈’ 미래
  • 김은석 제주대학교 교수
  • 승인 2018.0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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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신비·예술의 경이로움 상실
발 디딜 틈 없는 인파 속 줄서기
작품들에 ‘놀람’ 있어도 ‘울림’ 없어

어떤 위대함도 순수성 잃으면 소멸
제주 역시 물신에 현혹 위기
정체성 확립 위한 성찰적 지혜 필요

 

서구문명의 매력은 로마에 있다. 그리스의 아킬레우스(Achilles)가 자신의 운명에 맞선 영웅이라면, 로마의 아이네아스(Aeneas)는 개인을 뛰어넘은 건국 영웅이다.

그런 도시답게 지중해를 호령한 영웅호걸들의 경연장, 그리스도교 세계종교의 발판을 이룬 베드로의 순교지, 그래서 로마는 유럽 귀족들의 통과의례인 ‘그랜드 투어(grand tour)’의 종착지이자, 괴테의 말을 빌자면 좀처럼 졸업하기 힘든 위대한 학교이다.

콜로세움에서 시작한 나의 로마 기행. 이곳을 찾은 괴테는 “만월의 달빛 받으며 로마를 거니는 아름다움은 직접 보지 않고 상상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사실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고 한 그들 스케일이 콜로세움을 고대 최고의 고전양식으로 거듭나게 한 걸까? 생각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 순간만큼은 보석은 작아서 빛나고, 마음은 평범해서 소중하다는 말을 접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로마는 들여다볼수록 역사를 평가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여정인가를 실감케 한다. 5만 여명을 메우는 이 원형경기장은 결국 빵과 서커스로 백성의 눈과 귀를 현혹시킨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이 우민화의 결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시대). 그 현란한 수사에도 이면에 얼마나 많은 검투사의 주검들이 묻혔을까? 또한 황제 개인을 위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맹수의 먹잇감이 되었을까? 역설적이게도 피(血)로 물든 이 ‘쾌락의 바벨탑’이 무너진 순간, 인류 구원의 성지, 바티칸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감동만으로 부족할 것 같은 순례지에서 안개 낀 오름 사이로 펼쳐지는 여백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베드로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지상 최대의 교회, 산피에트로 대성당에는 어느 하나 소홀히 지나칠 곳은 없다.

하지만 발 디딜 틈 없는 인파 속에서 신앙의 신비와 예술의 경이로움은 주위가 허락하지 않는다. 입구부터 세상에서 가장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 그래서 유한한 인간이 영원과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경건함 대신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경고가 더 와 닿는 곳이다.

결국 기대 속에 찾은 미켈란젤로의 예술혼이 깃든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는 ‘놀람’은 주지만 ‘울림’은 없다. 오히려 인증샷을 찍으려는 관광객의 셔터 소리들만 요란할 뿐이다. 500여 년 전 성지순례에 나선 비텐베르크대학의 신부 루터가 좌절한 것은 이런 장면 때문이었을까?

하긴 ‘비움’의 절정인 우리 산사(山寺) 역시 ‘채움’으로 물신화된 것을 감안하면 남 탓할 일도 아니다. 더욱이 비웠기에 청정해지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도량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니 세계화된 한국 사찰의 운명이 어떨지 솔직히 걱정된다.

여행은 ‘떠남’과 ‘만남’, 그리고 ‘돌아옴’이라고 한다. 결국 이번 로마기행은 고대문명의 유장함을 보기위해 떠난 길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것은 아우라의 상실이다. 카뮈는 이 충격을 전한다. “만일 내 인생의 전환기라면 그것은 내가 얻은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잃은 그 무엇 때문이다.” 결국 로마기행에서 깨달은 것은 그 어떤 위대함도 순수성을 잃으면 소멸된다는 사실이다.

12시간 비행 끝에 찾은 로마, 하지만 내내 제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번 기행의 끝 지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이렌(Siren)의 노래에 유혹된 듯, 한 연예인이 다녀간 뒤로 북새통을 이루는 금악오름의 운명을 떠올려 본다. 자연을 온통 상품화하려는 이 제주의 현실은 물신에 유혹되어 스스로 좌초되는 전조는 아닐까? 온통 렌터카와 숙박시설로 덧칠해진 제주에 백록(白鹿)이 사는 한라산의 신비로움은 더 이상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7대자연경관이니 유네스코 3관왕이니 하는 과장 광고가 아니다. ‘울림’과 ‘공감’을 주지 못하는 제주는 결국 회한의 장소로 전락할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로마는 물신구조에 의해 매몰된 회한의 장소이다. 그렇다면 제주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성찰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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