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의 잔혹성
부르주아의 잔혹성
  • 김은석 제주대학교 교수
  • 승인 2018.0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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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오너 일가 또 갑질로 수사
재벌들의 ‘가학적’ 사디즘
‘자본주의의 불의’ 해결 노력 실패

재벌들에게 변화 기대는 환상 불과
우리가 ‘그 틀’ 만들어야
‘촛불’처럼 머리 맞대면 변화 가능

 

문득 초등학교 때 읽던 안데르센의 동화가 떠오른다. 설날 전야 추운 거리를 맨발로 한 소녀가 성냥을 팔려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이 소녀에게 창문 너머로 잘 차려진 부자의 저녁 식탁이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온 종일 굶은 이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성냥을 하나씩 켜면서 화려한 만찬을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요즘 나는 성냥팔이 소녀의 눈에 비친 부자들의 저녁 식탁 장면과 우리 현실의 상관관계를 유추해 본다.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대한항공 오너 일가는 또 다시 ‘갑질사건’으로 수사를 받고 있다.

계속되는 이들의 화려한 만찬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성냥팔이’ 직원들이 사시나무 떨듯 살아 왔을까? 한국 자본주의의 천박한 민낯을 그대로 보는 듯 싶다.

공자(孔子)는 “남을 부리는 자는 아랫사람을 잔인하게 다루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재벌들의 가학적(加虐的) 사디즘(sadism)은 이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사실 자본가에게 인자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다. 이기심이 시장원리이고 자본주의의 덕목이다. 베푼다는 것은 자본축적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요인이다.

물론 많이 가졌다고 해서 정의롭지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업을 자신의 전유물로 다루는 것까지 정당화할 수 있을까? 16세기 휴머니스트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이 점에 대해 단호하다. “돈이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게 또 행복하게 통치할 수는 없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 최악의 시민들 수중에 있는 한 정의는 불가능하다.”

프랑스 역사가 브로델(Fernand Braudel)은 모어가 살던 당시 자본가의 비정함을 폭로한 한 문건을 소개한다. 1573년 부르주아 거주지인 트루아에 빈민들이 몰려들었다. 이들과의 동거를 거부한 부르주아들은 빈민 추방을 위한 묘책을 꾸몄다.

그들은 “성문 밖에서 빈민들에게 빵과 돈을 나누어준다”고 했다. 빈민들은 빵 한 조각과 은화 한 닢을 받으려고 몰려들었다. 맨 마지막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성문이 닫히고 말았다. 빈민들의 망연자실함을 바라본 부르주아들은 환호했다. 브로델은 이를 가리켜 ’부르주아의 잔혹성‘이라고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잔혹성과 불의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소비에트 체제 역시 관료들의 천국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도 역사의 교훈을 외면할 때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그래서 막스 베버(Max Weber)는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을 연계하여 금욕적 직업윤리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한국재벌의 즉물적(卽物的) 사고를 대신할 새로운 기업윤리는 무엇일까?

물론 현실에서 재벌들에게 이를 기대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우리가 그 틀을 만들어야 한다. 역사는 다수에 의해 늘 변화를 요구했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왔다.

최근 대한항공 국적기를 철회하라고 정치권까지 나서고 있지만 자칫 본질을 흐리는 게 아닌가 싶다. 부르주아의 잔혹성 때문에 체제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것처럼, 비뚤어진 기업가 때문에 기업까지 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가장 큰 피해자는 일선에서 소임을 다하는 직원들이 아닌가? 그들에게 기업은 생활터전이고 자기 정체성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적 대안이지 국적기 존폐 여부가 아니다. 성숙한 시민에게는 이 사건을 통해 기업의 존재이유가 어디에 있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살피는 일이 훨씬 중요한 일이다.

광화문 촛불이 이루어낸 기적처럼 한 두 사람이 시작하여 수천 명, 수만 명이 머리를 맞대면 사회는 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인 정호승은 “남은 발자국들끼리 서로 뜨겁게 한 몸을 이루다가 녹아버리는 것을 보면/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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