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늦게 ‘사랑’을 시작한 술
몸에 유익한 유산균·식이섬유 풍부
다른 술 비해 인체에 좋다는 연구도
뜨는 방법 따라 동동주·청주·막걸리
누구와 무엇과도 잘 어울리는 술상
‘과유불급’은 스스로 알아서
벚꽃이 봄바람에 휘날리며 생을 다하자 노란 송화 가루가 찾아왔다. 그런데 봄비치곤 많은 양의 비가 까만 자동차 위에 노랗게 내려앉은 송화 가루를 시원하게 씻겨준다.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 같다. 제주참꽃 봉우리도 내리는 비에 잔뜩 웅크려 버렸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은 부침개 안주에 막걸리 한 잔이 그리워진다. 벗까지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막걸리만 있어도 좋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왔던 지난 겨울 나는 막걸리 예찬가가 돼 버렸다. 추운 겨울 마시는 막걸리는 최고였다. 한 두잔 따라 마시고 하루 이틀 보관해도 특별하게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매일 밤 막걸리와 ‘사랑’에 빠지다보니 이렇게 자주 마셔도 괜찮은 건지 걱정 아닌 걱정에 검색을 해봤다. 한 마디로 막걸리는 몸에 유익한 유산균 덩어리다.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가 맥주 수준에 불과한데다 식이섬유가 풍부하다고 한다.
막걸리는 물이 80%, 그리고 알코올5~7%·단백질 2%·탄수화물 0.8%·지방 0.1% 수준이다. 나머지 10%는 식이섬유와 비타민B·C 및 유산균·효모 등이다.
조선시대에 막걸리를 좋아하는 판서 한분이 있었다고 한다. “좋은 소주와 약주가 있는데 하필이면 막걸리만 드시냐”고 자제들이 묻자 “아무 말 않고 소 쓸개주머니 3개를 구해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빈 쓸개주머니 3개에 각각 소주와 약주·막걸리를 담아 며칠 후에 열어봤더니 소주를 넣은 쓸개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고, 약주를 넣은 쓸개는 상해서 얇아져 있었으며 막걸리를 넣은 쓸개는 오히려 두꺼워져 있었다고 한다.
한 항아리에 태어났으면 서도 약주는 쓸개를 해치는데 막걸리는 쓸개를 튼튼하게 한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식품영양학의 최고 권위자인 유태종 박사는 연구를 통해 막걸리가 같은 농도의 주정을 함유한 다른 술에 비하여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월등히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한 바 있다.
막걸리는 서민들의 벗이다. 나의 절친 김 교수는 해마다 서너 번 제주에 내려와 내 집에서 며칠씩 머물며 함께 오름도 오르고 곶자왈도 탐방하며 스케치 다닐 때 마다 “행복해!”를 연발한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를 즐기고 돌아오는 길 막걸리 2병을 사들고 유수암 갤러리로
돌아온다.
제주막걸리를 앞에 놓고 작업얘기며 세상살이 늘어놓는 시간 또한 우리가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다. 가끔 제자들까지 제주로 불러들이는 날은 막걸리 파티가 벌어지고 정겨운 목소리에 유수암 밤하늘은 별만큼 깊어간다.
김 교수는 제주에 내려올 때마다 서울서 바리바리 음식 재료들을 싸들고 온다. 머무는 동안 집 밥 해 먹인다며 하루 세끼를 챙겨 먹이며 내 몸과 마음을 넉넉하게 살찌워 놓고 올라갈 때는 빈 아이스백에 제주막걸리를 꽉 채워 들고 간다. 코 맹맹 목소리로 “쌤 보고 싶어요” 전화가 걸려올 때면 나만큼 막걸리가 그리운 거다.
물론 토종밀로 만든 누룩으로만 담은 전통발효 막걸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만족하며 즐겁게 마시고 있다. 시중의 모든 막걸리는 누룩이 아니라 일본산 효모로 만든다고 한다.
전통발효 막걸리는 밀로 누룩을 만들고 쌀로 고두밥을 지어 물과 섞어 빚는다. 덜 삭은 고두밥 알갱이가 술덧 위에 동동 뜰 때, 이때 국자로 쌀알과 함께 술을 떠내면 ‘동동주’가 된다.
술을 떠내지 않고 그냥 두면 쌀알이 가라앉고 맑은 술이 된다. 맑은 술이 된 윗부분만 떠내면 ‘청주’가 되고, 그 밑에 가라앉은 지게미를 술덧과 함께 체에 걸러내면 ‘막걸리’가 된다.
이름 유래도 여기서 나온다. 동동 떠있다 하여 동동주, 맑다(淸) 하여 청주, 막 걸러냈다 해서 막걸리다.
막걸리는 구수하고, 그러나 마냥 달달하지만은 않은, 그러면서도 누구와도 어울리는 술상이 되어 준다. 특히 안주가 화려하지 않아서, 아니 그럴 수 없기에 더욱 좋다. 그래서 소박하게 격식 없는 무엇과도 잘 어울려 막걸리 술상은 언제나 낭만이 있고 풍족하다는 느낌이다.
막걸리가 비록 알코올 도수가 낮고 건강에 좋은 성분이 많이 있다고는 하지만 술은 확실한 술이다. 매사가 그렇듯 과유불급은 스스로가 경계해야할 일이다. 지금도 막걸리 한 잔의 낭만과 여유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