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발생 원인 제대로 알아야 ‘정명’도 가능”


“일본에 살 때 어릴 적부터 어머니 할머니들이 한라산 얘기를 많이 했어. 어떤 산인가 늘 궁금했지. 열 서너 살 때 제주에 처음 왔어. 한라산이며 제주의 바다 냄새, 푸른 산야, 오름. 그때 제주를 본 것이 내 일생에 큰 충격을 줬지. 내가 일본 사람이 아니구나. 조국을 찾아야 한다.”
이후 몇 번 더 제주를 출입했고, 스무 살 무렵 태어나서 처음 조선의 역사와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민족주의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4·3을 얘기하지 못 하던 1970년대 제주4·3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 ‘화산도’의 연재를 시작한 김석범(93) 선생이 4·3 70주년을 맞아 4일 제주북초등학교를 찾았다. 굴곡진 제주 현대사의 현장이었던 제주북초등학교(교장 박희순)가 4·3 70주년을 맞아 마련한 ‘김석범을 만나다, 4.3 70주년을 말한다’ 특별강연을 위해서였다.
4일 북초 체육관에서 마주한 그는 “1945년 스무살 때 징병검사를 받다 헌병한테 두들겨 맞았는데, 그 자리가 바로 이 곳”이라며 슬픈 웃음으로 도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초 이번 강연은 이석문 제주 교육감과 김석범 작가 간 대담형식으로 꾸려질 예정이었지만, 청력이 약해진 아흔 셋의 노(老) 작가를 배려해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현장에는 300명이 훌쩍 넘는 도민들이 참석했다.
제주에 오래 살아보지 않고서 어떻게 제주의 삶을 그리 섬세하게 그려냈느냐는 질문에 그는 울컥 눈물을 보였다. “고향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나요. 나는 조국 상실자, 고향 상실자.”
일본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던 그는 열서너 살이 되던 어느 해 제주에 왔다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의 고향은 바다의 짠내가 나는 실체하는 그 무엇이던 것. 희미하던 조국이 그의 앞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가 일본에서 일본어로 배우는 것은 우리가 원치 않게 나라를 빼앗겨서라는 걸 깨닫게 됐다.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 작가 김석범의 출발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몇 차례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세상이 내가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그는 “젊은 시절의 건방진 허무주의”였다고 되돌아봤지만, 그것은 무엇에 내 삶을 걸 것인가를 고뇌하는, 삶의 애착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읽혔다. 당시 그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4·3을 소재로 한 첫 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썼다고 했다.
4.3에 대한 정치적 입장도 풀어냈다. 그가 생각하는 4·3의 완전한 해결은 보상과 더불어 원인 제공자들의 공식적인 사과라고 말했다. 사과의 주체는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 그리고 일본 앞잡이들이라고 꼬집어냈다.
그는 “단독정부를 세우고 싶었던 이승만 정부가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몰아 학살을 자행했고, 미군정이 이를 이용한 것이 4·3”이라면서 “이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는 것이 4·3의 정명이고 4·3의 해방이고, 여러분들이 말하는 4·3의 완전한 해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4·3은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제이며, 원인이 제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면서 “역사, 특히 4·3의 발생 배경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여러분의 제주도가 아니냐”고 힘주어 말했다.
아흔 셋의 노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이날 강연장을 찾은 도민들은 그의 애잔함과 분노가 반복되던 깊은 눈빛에서 오늘, 70주년 이후 다시 우리가 나아가야 할 4·3의 방향을 선명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김석범 선생은 현장을 찾은 어린 학생들에게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이 서 있는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되, 나쁜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해달라"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