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오는 데 70년이 걸렸네요…대통령도 다시 방문하고 이제서야 세상이 바뀐 것이 실감나네요”
제70주년 4·3희생자추념식이 열린 3일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만난 4·3희생자 유족인 오유생(86), 오축생(84) 할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에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4·3당시 10대 소녀였던 두 자매는 70년의 세월을 거치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지만 1948년 11월 아버지가 민간인 복장을 한 군인에 의해 끌려가던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두 할머니는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날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언니인 오유생 할머니(86)는 “우리 가족은 제주시 아라동 중산간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4.3사건 후 소개령이 내려져 인근 해안가 마을로 피신하게 됐다”며 입을 뗏다.
이어 “해안가 마을로 내려온 그 다음 날 민간인 복장을 한 군인들에 의해 아버지가 연행돼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다”면서 “대구형무소에서 아버지가 쓴 편지가 종종 왔었지만, 6.25전쟁 때 소식이 끊겼고 그 뒤로 유골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남편 김영부(78) 할아버지와 함께 온 동생 오축생 할머니는 “그 때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몸이 아파서 우리와 같이 해안가로 내려가지 못해 마을에 남아있다 총살을 당했다”며 옛 기억을 반추했다.
또 “큰오빠도 예비검속 때 끌려가서 제주도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이 사라봉을 비롯해 발품을 팔아 다녔지만 영영 행방을 찾지 못했다”며 “이곳 말고도 가족들 표석이 여러 군데 있다”고 말했다.
이들 가족은 “봄이 오는 데 70년이 걸렸지만, 대통령도 또 다시 참석하고 관심 있는 국민들이 많아져 세상이 바뀐 것이 실감난다”면서 “나이 80먹은 우리는 10년이면 세상을 떠날 것 같은데 유족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게 정부에서 4·3해결을 위해 노력해 주길 바란다”고 소망을 전했다.
한편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불인 묘역에는 오유생(86), 오축생(84) 할머니 가족처럼 4·3의로 희생됐지만, 시신을 찾지 못한 3896기의 묘비가 조성돼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