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혼란했던 해방공간 시기 국가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한 제주 4·3이 발생한지 올해 70주년이 됐다.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완전한 해결과 정명(正名)을 위해 4·3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해 우리나라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사건으로 촉발됐던 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5000~3만 여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됐으며,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이 불탔으며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됐다.
1954년 4·3이 종료되면서 폐허가 된 마을의 복구와 정착사업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4·3이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 콤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4·3위원회’에서 심사해 확정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84.3%(1만2000명), 무장대 12.3%(1756명)이다.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 5.4%(770명)와 61세 이상 노인 6.3%(901명)이 전체 희생자의 11.7%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1%, 2,990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이루어진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으로 인해 마을공동체의 파괴 및 소실, 공공시설의 소각 피해, 산업부문의 피해 등의 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마을 피해는 300여 마을(자연촌)이었으며, 가옥 피해는 2만여 호(戶), 4만여 채이다. 이 수치는 1953년 제주도 당국이 공식 발표한 이재 호수 1만9934호, 소실 동수 3만9285동과도 일치한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처형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됐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예비검속이 실시됐다.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됐다.
4·3의 또 다른 아픔은 당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되었다는 것이다.
사태의 와중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아왔다.
2000년 8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