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정부 5개월 동안 참혹한 집단 살상 자행
희생자 수만명 달해·100여 개 마을 사라져

[편집자주] 혼란했던 해방공간 시기 국가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한 제주 4·3이 발생한지 올해 70주년이 됐다.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완전한 해결과 정명(正名)을 위해 4·3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1945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이승만 정부는 4·3사건 종식을 위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것과 38선을 철폐하고 조국 통일을 이루자는 명분으로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했다. 이른바 여순사건이다. 이로써 4·3은 다시 한 번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됐다.
이어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군에 지시했다. 이 지시는 ‘초토화작전’이 미국과의 교감 속에 진행됐음을 암시하고 있다.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행해졌다. 4·3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2만5000~3만 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전인 1948년 9월말까지의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태웠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자행됐다.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을 저지른 곳도 많았다. 일부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소개해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누명을 씌여 총살했다.
이러한 소개작전은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 입산하게 만들었다. 이는 수많은 주민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1948년 11월 이후 무차별 토벌작전이 벌어진 이후에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강경진압은 계속됐다. 군 수뇌부는 2연대에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북청년단원들을 파견했다.
토벌대는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했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1949년 1월 17일 ‘북촌사건(1949년 1월 17일 육군 제2연대 3대대 병력이 북촌리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전사한데 대한 보복으로 북촌마을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350여 명을 집단 총살한 사건)’도 2연대 3대대에 의해 집행됐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선무공작에 따라 많은 입산자들이 피신해 있던 은신처를 나와 삼삼오오 귀순해 왔다. 귀순자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제주읍내와 서귀포의 임시수용소에 가둬졌다. 선무작전이 4월까지 수행되면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속출했다. 당시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과 자진 귀순하거나 체포돼 포로가 된 자를 합쳐 거의 1만여 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