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도화선 된 ‘3·1절 행사’
4·3 도화선 된 ‘3·1절 행사’
  • 김종광 기자
  • 승인 2018.0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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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절 발포사건과 3·10 민관 총파업
집회해산 길 아이 다쳐 항의 군중에 총격
경찰 발포사건 이후 총파업 이어져 혼란
세계냉전 속 ‘고립된 섬’서 큰 희생 발생
▲ 지난해 4월 1일 제주 4·3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 사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해원상생굿’이 제주시 관덕정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은 3·1절 발포사건 희생자 유족과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등이 영혼들을 위무하고 저승으로 잘 보내주기 위한 질치기 의식 모습. [제주매일 DB]

[편집자주] 혼란했던 해방공간 시기 국가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한 제주 4·3이 발생한지 올해 70주년이 됐다.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완전한 해결과 정명(正名)을 위해 4·3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본다.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 45분경 관덕정 앞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경찰의 총탄에 맞은 주민 여러 명이 피범벅이 된 채 나뒹굴었고 결국 6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제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고, 3·10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제주읍 북국민학교에서 집회가 끝나 해산하는 길에 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때 경찰이 다친 어린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군중들이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이 이에 대응하며 총격을 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 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다. 이 발포사건으로 제주도내 민심은 극도로 악화됐다.

이 사건의 여파로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관공서는 물론 은행, 회사, 학교, 운수업체,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기관·단체와 현직 경찰관까지 참여한 대규모 총 파업으로 이어졌다.

미군정과 경찰은 3·10 총파업의 사태 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하며 파업의 원인을 ‘경찰의 발포’보다는 ‘빨갱이의 선동’에 비중을 뒀다.

미군정은 3월 8일 합동조사반을 제주에 파견해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으나 공식적인 진상 발표는 하지 않고 3월 13일 돌아갔다. 3월 14일에는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내도하여 총파업을 와해시켜 나갔다.

미군정은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해 총파업에 강경 대응했다.

특히 미군정 조병옥 경무부장은 3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해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이 사건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해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조작했다. 미군정이 이 사건 직후 기록한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됐다.

미군정은 3월 15일부터 파업을 주모한 혐의로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4월 10일까지 500명을 검속했으며, 검속된 자들 가운데 5월말까지 328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52명이 실형을 언도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1947년 3·1사건 이후 1948년 4·3사건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00명이 검속됐다.

전 도민의 공동체적인 3·1절 기념식 참여와 3·10 총파업 동참은 미군정으로 하여금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오인케 했으며, 4·3으로 가는 길목에서 제주 사람들은 고립된 작은 섬에서 세계 냉전 구도가 빚어낸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은 “3·1절 기념대회에 3만이 넘는 제주도민이 모인 것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는 큰 기대를 품은 제주도민들의 마음이었다”며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의 탄압은 이러한 제주도민의 염원을 짓밟는 행위였다. 이제는 이 같은 역사가 되풀이하지 않도록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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