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 있는 저항·봉기에 반역의 ‘멍에’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통한의 삶들
올해 4·3이 70주년을 맞이한다. 그래서 지난해 3월 제주4·3희생자유족회 등 60여개 민간단체들이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결성한데 이어 4월에는 도내 64개와 전국 80개 등 144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도 출범시켰다. ‘행사’를 의미 있게 치르기 위함이다.
4·3 70주년을 앞두고 ‘반역’과 ‘반공’을 생각해본다.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들에겐 너무나 무겁고 치 떨리는 ‘멍에’였을 이름이다. 그러나 묘한 것은 이들이 다른 이름을 하고 있을 뿐, 실은 2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하나’라는 사실이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서에 기록된 제주의 ‘반역’을 보자. 고려 조정이 갖다 붙인 ‘반역’사건에는 항상 장두(狀頭)와 그를 따랐던 많은 제주사람들이 있었다. 제주사람들은 제주를 통치하던 부패한 무리들의 탐학과 불의에 맞서 이들을 축출하고, 한 때 제주를 다스렸던 어진 명관을 내려 보내달라고 외친다. 결사적인 항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제주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명관이 오면 무기를 내려놓겠다고 약속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고려 조정에서도 왕명을 받들고 파견된 관리들이 가렴주구가 극심, 참다못한 제주사람들이 봉기했음을 잘 알았다. 이들 탐관들이 왕의 명령으로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 스스로가 제주사람들의 봉기가 이유 있는 탐관오리에 맞선 저항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런 사정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고 틈새가 주어지면 사특한 무리들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제주역사에서 장두와 제주사람들이 궐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도 결사항전은커녕, 탐욕스런 무리들에 대한 처벌과 적폐시정을 바랄 뿐이었다.
어느 장두는 무기 대신에 적폐시정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손에 들었고, 무기를 들었던 어떤 장두는 황명을 받들고 자수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단지 이들 장두들은 숱한 제주사람들의 불행을 외면하지 못하고 불의와 탐학에 맞서 ‘죽기를 각오’했을 따름이었다.
왜 이들이 귀한 생명을 걸었는지는 조선 왕조도 잘 알고 있었다. 조정이 탐오한 자들의 죄를 물어 형벌에 처했다. 제주사람들의 저항이 ‘이유 있는 봉기’였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고려나 조선의 왕조가 뒤집어씌운 ‘반역’의 죄 때문에 장두들은 죽임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반역’의 저주는 훗날 해방 정국에서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옷만 갈아입고, 불의와 탄압의 원점으로 등장했다.
이 저주가 활보하던 곳이 제주였다. 특히 경찰과 우익단체(서북청년단)의 불의와 탄압은 무소불위의 공포였다. 자기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빨갱이’로 매도하며 제주사람을 잡아갔다.
꿈같던 해방 조국, 그러나 무법천지가 된 제주도, 1947년 3·1절 기념행사부터 약 1년 사이에 검속된 사람이 2500명에 달했다. 계속되는 테러와 고문, 중학생을 포함한 3건의 고문치사와 총격사건 등 무고하고 숱한 희생이 잇따랐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그것처럼 제주사람들은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누구에게 과오가 있는지는 세상이 잘 알고 있었다. 미군 보고도 그렇다. ‘경찰의 탄압에 항의하는 것이지, 미군정 자체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제주사람들의 항의가 이유 있는 저항이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멈췄어야 될 일이었다. 여기까진 4·3이 발발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역사는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고, 어디에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역과 반공’의 저주는 제주의 저항에 대해 ‘이유 없는 주검’을 강제했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죽기를 각오’하고 불의에 맞섰던 모든 시대의 제주사람들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과연 무슨 이름이 마땅한 것일까? 4·3 70주년을 맞아 야누스의 얼굴 같은 ‘반역과 반공’ 통치 이데올로기를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 때가 이르렀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