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진 솥 하나 있었네
누군가는 버렸다고 하고, 누군가는
떠나며 남겨두었다고 하네
어느 겨울
솥을 가득 채운 눈(雪)을 보았네, 문득
갓 지은 보리밥이 수북한 외할머니 부엌의 저녁이 떠올랐네
산전의 깨진 솥은, 그해
뜨거운 김을 몇 번 내뿜었을까
달그락거리며 솥바닥을 긁던 숟가락은 몇이었을까
겨울이 수십 번 다녀가고
수천 번 눈이 내리고, 얼고, 녹아 흘렀어도
그날의 허기가 가시지 않았네
아직 식지 않았네 (‘山田’ 전문)

제주작가회의 이종형 시인이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을 발간했다. 2004년 ‘제주작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13년 만에 묶어낸 첫 시집이다.
1부를 가장 먼저 여는 시는 제주4·3 당시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지휘하던 무장대 최후의 은거지에 관한 이야기(‘山田’)다.
이덕구가 죽은 뒤 은신처에 남겨진 쓸쓸한 솥 하나. 사람들은 누군가 버린 것이라고도 하고, 그가 떠나며 남겨두었다고도 하는데, 화자는 그 솥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화자의 삶 기저에 4·3이 자리했음을 나타낸다.
이어지는 시 ‘자화상’에서는 그 비밀이 한 겹 더 벗겨진다.
‘만삭의 내 어머니…/대숲에 성긴 바람도/숨죽이던 겨울 근처/섬은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는데/어머니 배만/봉긋 솟아 있었다는데//…육군대위였다는 육지 것 내 아버지…//어머니 눈물짓기 딱 좋았던/동짓달 스무 사흗날 밤/갓난아기는 울지 않았다는데/저야 모르는 일이지요//다만, 동짓달 까맣게 사위던 밤이었다는데’ (‘자화상’ 중)
시 ‘자화상’의 부제이기도 한 동짓달 스무 사흗날은 시인의 생일이다.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에서는 시인이 제주4·3에 천착하는 이유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아비보다 더 나이든 사내가 되었습니다//유품이라고 남겨진/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한없이 가엽고 가벼우나/마침내 사내는/세월을 거슬러 돌아와/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중)
시인은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에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제주4·3으로 인한 상처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제는 70년이 지나 화해와 상생을 부르짖지만 누군가 온 생애를 걸고 견뎌낸 4·3엔 아직 명확한 이름이 없고, 그의 상처 역시 아물지 않았다.
세 살에 아비를 여의고 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삶이 허기지고 외로웠을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시로 인해 생의 변곡점을 지나는 계절들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고 고마워한다.
이 시집은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 4·3에 휘말린 개인사에 대한 감정들에 휩싸인 다음, 새로운 생명을 얻음으로써 맞게 되는 삶에 대한 담담한 기쁨을 거쳐, 베트남 민중들에게 손을 내미는 구조로 짜여졌다.
그래서 시집은 아주 개인적인 그만의 제의(祭儀)이면서, 4·3 70주년을 맞는 새해 작은 민초들의 생의 시각에서 4·3의 아픔을 생각케하는 출발점이 되게 한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지나온 시간들이 누추해지지 않아서, 태어나고 살아온 내력과도 마침내 화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고 적고 있다. 총 57편의 시가 실렸다. 삶창시선·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