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완전한 해결 정치권 약속 이행 ‘관건’
4·3 완전한 해결 정치권 약속 이행 ‘관건’
  • 문정임 기자
  • 승인 2017.1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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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호] 꼭 70년, 제주4·3이 걸어온 길과 과제

‘나는 맨발로 너를 품고 사생결단 내질렀다(…)
거친 오름 낮은 계곡으로 치달을 때
기어이 너는 세상을 열었구나
와랑와랑 핏물 흥건한 바닥에 너를 내려놓고
불속 뛰듯 달려야 했다 아가야
(…)콸콸 쏟아져 내렸으나
너를 어쩌지 못 했다 아가야
(…)그 때 내 몸은, 검붉다 못해 뜨거운 용암덩이
나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었다 아가야(…)’
    
     
            

                                                                (허영선, ‘죽은 아기를 위한 어머니의 노래’ 중)

그 해 제주 섬은 소리죽인 울음과 공포가 뒤덮었다. 허영선의 시집 ‘뿌리의 노래’에는 이런 여인들의 아픔이 실려 있다. 경찰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잃어버린 여인, 연미마을에서 홀로 여섯 아들을 키우다 그 중 다섯을 잃은 여인, 만삭의 몸으로 아이를 잃은 여인. 평생을 짓누른 그 날의 이야기는 제주에서 시로, 소설로 다시 태어났다. 이름마저 두려웠던 제주4·3이 올해로 꼭 70년. 사건의 발생에서 제도권에서의 명예회복 과정,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를 좇아가 본다. <편집자주>

△70년 전 그날의 기억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제주도민들은 항의했다. 관공서까지 가담한 총파업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를 제주도로 보내 진압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과 일부 주민 350명이 경찰과 우익단체의 탄압 중지, 통일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미군정은 군대까지 동원했지만 사태는 쉽게 수습되지 않았고, 5·10총선거에서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투표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는 전국 초유의 사건을 빚는다.

제주도의 무장봉기는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승만 정부는 군대를 증파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며 강경진압을 펼친다. 이듬해 3월초까지 4개월간 민간인을 집단 살상하고, 제주도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을 불태웠다. 1949년 5월 재선거가 성공리에 이뤄진 후 무장대는 거의 궤멸되었으나 1954년 9월 한라산 출입이 허용되기까지 2만5000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희생됐다.

▲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1948년 가을부터 제주지역 기관장과 유지들도 대거 수용되었다.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사진.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발췌.
▲ 2000년 8월 28일 정부 측 위원과 민간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4.3위원회 현판식이 열렸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발췌.
▲ 2003년 10월15일 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통과시킨 제8차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고건 국무총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발췌

△그리고 반세기 갈등의 세월

해방 후 7년간 이어진 4·3사건으로 제주공동체는 철저히 파괴됐다. 7년간 도민 인구 11% 가량이 희생됐다. 많은 이들이 연좌제에 묶여 좌절했고, 피해자 본인과 가족들은 회복되지 않는 장애와 육체적 상처,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금기어였던 제주4·3이 처음 사회에 드러난 것은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 호에 현기영의 ‘순이삼촌’이 발표되면서다.

앞서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 조사단이 꾸려지고 학살 피해 접수가 이뤄지는가 싶었지만 다음해 5·16군사정변으로 다시 4·3은 땅 속 저 밑으로 가라앉았다.

1980년대 후반, 격렬한 민주화 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대학가와 민주화운동단체들의 4·3 진상규명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89년 제주4·3연구소가 피해자·유족 채록 집을 출간했고, 지역 언론이 4·3 보도에 가세했다. 민중항쟁론적 시각에서 4·3을 연구한 결과물들도 나왔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에는 제주도의회에 4·3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김대중 정권기인 1998년부터는 진상조사가 시작된다. 2000년 여·야당 합의에 의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하 4·3특별법)이 공포되기에 이른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2003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됐다. 그 해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를 방문해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2008년 제주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한 제주4·3평화공원과 기념관, 제주4·3평화재단이 설립돼 추가 진상조사와 희생자 추모사업 및 유가족 복지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4년 3월에는 박근혜 정부가 4·3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

그러나 4·3이 가야할 길은 아직 멀다.

우선 정명의 문제가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는 광주 시민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지만 제주4·3사건은 4월3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건조한 뜻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배·보상 문제는 유족들의 오랜 숙원이다. 제주4·3위원회의 활동으로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진료비 지원 이외에 직접적인 배·보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4·3 해결의 부침도 여전하다. 박근혜 정권에서 제주4·3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는 소기의 성과가 있었지만 지난 이명박, 박근혜 보수 정권 10년간 일부 보수단체들은 여전히 출판, 발언, 소송 등을 통해 4·3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울러 미국의 책임문제에 대한 규명도 반드시 이뤄져야 할 부분이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위원장 손유원)가 지난해 11월 만 19세 이상 도민 8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4·3의 과제로 진상조사, 암매장 추정지 추가 발굴, 정명작업, 신고 상설화, 배·보상 문제가 1~5위로 꼽히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오영훈 의원(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제주시 을)은 4·3특별법 전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률 개정안은 제주4·3사건의 새로운 정의와 정명문제, 유가족 배·보상, 상처 치유를 위한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 시행 및 4·3트라우마 센터 설립 등 4·3의 과제를 폭 넓게 반영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정치권의 의지에 달렸다.

지난 5월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바른정당 유승민, 정의당 심상정을 비롯한 각 당 후보들은 하나같이 제주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새 정부는 4·3문제 해결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하고 △4·3행방불명인 유해 발굴 △4·3희생자 추가 신고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 추진 △과거사 피해자 배·보상 등을 세부 계획으로 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4·3을 자신의 삶 전체로 목도한 피해자와 유가족은 사라지고 있다. 이는 4·3의 아픔을 평화의 물결로 전환하려는 에너지가 점차 소실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4·3 70주년, 이제 4·3의 완전한 해결은 정치권이 자신의 약속을 지켜주는 일만 남았다.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은 “4·3은 상처받은 지난 세대만은 위한 일이 아니라 오늘 혹은 내일 우리가 겪어야 하는 제주 섬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며 “2018년은 4·3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그에 따른 후속 업무를 조속히 추진해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각인시키는 원년이 돼야 한다”는 강한 바람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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