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이 있기에 오르듯
그 사람이 있어 사랑하는 데
왜 나의 욕심이 더해져 푸념할까
삭막한 사막도 ‘꿈’이 있어 아름답고
겨울 햇볕도 찬 기운 속에 있어 소중
작지만 귀한 존재 내 가족·이웃들
한 산악인에게 “왜 산에 오르냐?”고 묻자 “산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왜 사랑하느냐는 말에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 사람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누구네 집에 가보니 그 사람 아내가 어찌나 상냥한지, 그 아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지…” 푸념들을 늘어놓으면서 ‘내 욕심이 빚어낸 또 다른 내 아내와 또 다른 내 가족들을’ 요구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난 밤 강의준비를 하다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꺼내 들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마당 한 켠의 꽃들을 적시고 있었다. 대문 앞 가로등에 비친 노란 국화가 유리알처럼 맑게 반짝였다. 여유롭게 바라보면 이처럼 모든 것이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일까?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거든요.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중요한 것은 물어보지 않지요. 어른들은 아버지는 부자니 하는 것들만 묻지요. 그리고는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거든요.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예쁜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붉은 벽돌집을 보았어요’ 라고 하면 어른들은 그 집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거든요. 그러나 ‘2만 달러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하면 그때서야 ‘야 굉장한 집이겠구나!’ 하고 감탄합니다.”
새삼스럽게 이 구절을 다시 읽는 것은 생떽쥐뻬리 작품의 순수성에 감동하던 젊은 날의 추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덧 내 자신이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현실과 그것이 빚어낸 안타까움의 크기 때문이었다.
사실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지금에 와서 더 큰 짐을 지는 까닭은 작품 속 주인공의 지적처럼 나는 ‘아무도 사랑한 일 없고, 일상 하는 일이란 덧셈 뿐’, 그리고 바쁘단 말을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면서 그 말이 무슨 자랑인양 뽐내고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린왕자’를 접한 지 어느덧 40여년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의 크기는 텅 빈 객석에 혼자 앉아있는 것만큼 허전하기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돌이켜보면 강의실에서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해왔지만 그건 나의 오만이자 위선이었다. 정작 나 자신은 내 작은 것에 부끄러워하고 실망하는 지금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학창시절 밤늦도록 고뇌했던 아픔의 결과는 분명 아닌 듯하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왜 내 아내는, 왜 내 가족은’이라는 이유를 달면서 남과 비교하는 그런 미숙함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린 왕자가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꽃은 나에게 향기를 뿜어 주었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는데. 그 말 뒤엔 따뜻한 마음이 숨어 있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 땐 난 너무 어려서 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눈이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 꽃을 사랑하는 것처럼 내 아내, 내 가족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싶다. 몸은 옷을 벗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옷을 껴입을 때 부끄러운 법이다. 겨울로 접어든 이 무렵, 오히려 여러 겹 쌓았던 거추장스런 욕심의 옷을 벗어버리고 싶다.
삭막한 사막이 어찌 아름다울 리 있을까? 그것도 불시착한 사막 한가운데서 사투를 벌이는 순간에. 그럼에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어린왕자는 ‘꿈’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겨울 햇볕이 소중한 것은 그것이 오히려 차디 찬 기운 속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추운 겨울날, 언 손 호호 불며 선생님이 칠판에 써 놓은 것을 필기하다가 문득 시선을 멈춘 곳은 창문 너머로 들어와 교탁에 머물러 있는 햇빛, 그 한 줌이었던 초등학교의 기억이 새롭다.
그것은 비록 작지만 추위 속에 있어서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내 아내, 내 가족들, 내 이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