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로 왔던, 그리고 오는 사람들
어떻게든 지역사회에 영향
이주민들 마을마다 새로운 바람
지역민들 정서적 포용한계 여전
협력과 협동으로 타개해야
소통으로 변화와 발전의 기회로
조선시대 유배객들에게 하도 시달려서 대정현의 포구 모슬포를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라 빗대어 ‘못살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곳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바람이 드세고 척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죄인을 종신 유폐시키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래 4~5년 사이에 입도하여 ‘제주인’으로 살기로 한 이주민들이 중죄를 지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관 땅에서 여생을 ‘형벌’로 살게 된 것은 물론 아니다. 나름의 인생 설계를 새로이 그려보며 희망을 품고 이주해 온 사례가 압도적이다.
따라서 이들의 능력과 재능은 각기 자리 잡은 마을에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래전 제주도에서 영향력을 끼쳤던 유배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제주에 들어온 이유와 시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오늘의 이주민이나 옛날 유배인들이나 제주의 역사와 문화의 흐름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무리 거리를 둔다고 해도 근주자적(近朱者赤)·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영향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옛날엔 유배인들과 어울렸다가 경을 칠까봐 인위적으로 멀리함으로써 물리적 거리가 확실했다. 그러나 오늘날엔 서로 어울리고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물리적 거리까지 훅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주인으로 살려고 지역사회에 녹아드려는 노력까지 하고 있으니 제주사회에 대한 영향은 지금 이주민들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오래전 제주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쳤던 유배인들과 분명한 차별점이 존재한다. 수많은 사례로 알려진 대로 제주에는 꽤 많은 지식인들이 입도했다. 유배지 가운데 흑산도엔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이 순조 1년(1801) 천주교에 연루되어 유배돼 지식인이 손으로 꼽을 정도뿐인데 제주에는 고종 때 최익현·김평묵·김윤식 등 상당수 지식인들이 귀양왔다. 또한 ‘제주 오현(五賢)’은 김정(金淨)·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송인수(宋麟壽)·송시열(宋時烈) 등인데, 이 가운데 김정·정온·송시열 세 분이 유배인이다.
제주도에서 유배인들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은 비자발적이었다.
한산했던 제주 올레길은 이런저런 모습의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관광명소로 바뀌어 연신 카메라 렌즈에 담겨진다. 누추했던 처마와 낮은 돌담은 환한 미소를 담아내는 배경이 되었다.
제주의 모습은 오래된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스타성이 넘치는 배우처럼 온라인과 모바일을 통하여 퍼져나간다. 사람들의 눈과 가슴으로. 이런 모습을 창의해낸 것은 SNS를 통한 소통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자발적이다.
사랑받는 제주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지역의 주인으로서 삶의 터전을 지켜온 분들의 것이어야 한다는데 이견을 갖지 않는다. 다만 새로이 주인이고자 찾아 든 이주민들에 대한 정서적 포용한계는 여전하다.
어떤 이는 나름의 의지와 희망으로 봉사하며 사회를 살기 좋게 만들어보고자 한다는데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은 존재한다. 자발적 행동에 대한 부작용이라도 되는 듯 비자발적이었던 지난 세기 유배인들과 혼동되는 정서가 발견된다.
“어디서 완?”, “여기 살 거?”라며 진정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우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던 분들의 표정이 떠올려진다. 그만큼 이주민·외지인에 대한 우려가 깊은 탓으로 생각된다.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함부로 정을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심스러운 정서는 협력과 협동으로 타개해야 할 것이다. 지역 내 주민으로서 참여에 의한 발상과 협의에 나설 수 있게 해야 한다. 보다 나은 정책개발의 현장에 이주민의 잠재력을 적극 수용하려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개혁의 패러다임은 이전 시대 비자발의 유배인이 오늘날 자발적 이주민으로 주인공이 바뀌면서 제주사회는 SNS등 소통의 바람을 타고 변화와 발전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4·3과 같은 비극의 토양위에 밝고 희망찬 미래는 분명히 자발적 발로의 결과로서 찾아올 것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