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군주 정조가 칭송한 ‘제주여인’
당시 ‘세계적 인물’ 걸맞은 행사 필요
지난 주 김만덕 선양사업의 새로운 모색을 위한 포럼 자리에 토론자로 참석하여 나름의 생각을 얘기하게 됐다. 참석자들은 매년 개최되는 ‘만덕제’와 ‘김만덕상’ 시상 방식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에서 기념행사와 시상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공감했다. 필자 또한 김만덕의 현대적 보편화를 위한 역사적 근거와 개선 방안을 제시해 보았다.
우선 만덕에 대한 조선후기 정조 시대 당대의 평가를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18세기 후반 개혁군주인 정조의 김만덕에 대한 관심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정조는 1796년 11월 대신들을 편전에 부른 자리에서 채제공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경한 김만덕에게 금강산 구경으로부터 귀향 때까지 각종 편의를 제공해 주도록 왕명을 직접 내렸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그녀는 한 천한 기생으로서 의롭게 재물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데 힘을 썼으니 매우 가상하다. 그녀의 의기는 옛날 열협(烈俠)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여 직접 만덕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내의원에서 행수의녀(行首醫女)로 임명하게 하여 직접 만덕을 편전으로 불러들여 칭송했다.
정조는 변방 제주섬의 기녀 출신 만덕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권위가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루 미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보이고자 하였다. 자신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던 규장각 신하들에게 친히 만덕 전기를 써서 바치라고 한 것은 만덕을 통해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고자 함이었다. 당대 관료 및 실학자들 또한 만덕에 대한 전기 및 한시를 다수 남겨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서울 사대부·관료들의 평가는 대부분 만덕이 여성이라는 데 주목했다. 특히 재산을 모아서 의롭게 썼다는 점에서 만덕은 중국 진시황 때의 청(淸)이란 여성과 견주어졌다. 전국시대 파(巴)라는 지역에 살던 여인 청은 조상 대대로 경영해오던 금광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청은 과부였으나 가업을 잘 지키고,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을 지키며 사람들에게 침범당하지 않았다. 진시황은 그녀를 정조가 굳은 부인이라고 여겨 귀빈으로 대우해 주고, 그녀를 위해서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지어 기려주었다.
김만덕과 파촉(巴蜀)의 청(淸)이란 여인은 재산을 많이 축적하고 유지시켰다는 점, 자신의 자존을 지켰다는 점, 군주의 칭송을 받았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은 과부로서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조를 지켰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칭송을 받았지만, 만덕은 축적한 재산을 남을 위해 기부했다는 사실은 청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청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김만덕을 의협심(의리)과 재산 축적(재력가)의 면모를 겸한 인물로 평가했고, 진시황이 칭송한 파촉의 청이란 여인에 비유함으로써 만덕을 당시 중국적 보편문화의 척도에 견주어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김만덕의 보편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사대부 관료들이 김만덕을 파촉의 청과 비교한 것은 당시로서는 요샛말로 ‘세계적인’ 인물로 평가했음을 말한다. 그런데 현재 김만덕은 제주에 한정되거나 국내적인 인물 정도로 평가되는 듯하다.
앞으로 김만덕의 보편적 가치를 재정리하여 그 요체를 담는 기념행사를 독립사업 또는 연계사업으로 조직해야 할 것이다. 단독사업으로 추진한다면, 묘비에 명기된 사망 날짜를 기념일로 삼아서 새롭고 규모 있는 국제적인 기념행사를 구상했으면 한다.
연계사업으로 한다면, 탐라문화제보다 더 보편적이며 세계적인 행사를 물색해야 할 것 같다. 매년 개최되는 제주포럼 또는 앞으로 개최될지도 모를 ‘세계섬문화축제’ 등과 연계시키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김만덕 정신을 지나치게 부풀려도 문제겠지만,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의 평가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현재의 박한 평가는 더욱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