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광’ 제주의 전략 산업 분명
지난 반세기 지역경제 성장 동력
황폐해 가는 자연 등 ‘애환’ 초래
한라산도 포장해야 할 상품 전락
결국 ‘최대 다수의 최소 행복’ 귀착
‘주민들 입장에서 관광’이 화두
T. S. 엘리엇(Eliot)의 4월은 떠났다. 상흔만을 남긴 제주에도 잔인한 4월은 가고 관광인파로 온 섬을 수놓는 5월이 찾아왔다. 사람보다는 말(馬)이 살기에 더 어울리는 곳, 정치범의 유배지, 폭도의 반란지로 서술되던 변방의 섬은 이제 투기 자본까지 걱정해야 할 만큼 한국의 노른자 위 땅이 되었다.
그러나 연일 수 만대의 렌터카가 온 섬을 달리는 상업적으로 스펙타클화한 제주의 5월은 과연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 것일까?
‘천혜의 관광지’, ‘청정제주’, ‘평화의 섬’ 모두 제주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용어란 어떤 목적과 결합할 때 그것이 아무리 순수하다 해도 그 속에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사회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전에 제주 풍광을 찍으려는 외국 사진기자와 동행한 적이 있다. 제주 바다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계획에도 없던 수중 촬영까지 나섰다. 그런데 바다에 들어갔다 온 뒤 그는 전 날까지 최고의 맛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세우던 제주 해산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가 제주 바다 속에서 본 것은 에메랄드 빛 청정바다가 아닌 수중 잿빛에서 신음하는 오염물이었기 때문이다.
‘청정제주’, ‘환경수도’라는 용어들이 가공된 ‘CF용’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런 용어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제주를 찾게 해야 하는 생존의 문제라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환상, 그 이면에는 반세기를 관통해온 모순의 전형이 있다.
관광이 제주의 전략적 산업임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제주를 이끈 성장 동력이다.
그러나 관광을 생업으로 삼는 지역이 애환은 무엇일까? 지로우(Gerow) 교수는 말한다. “관광지는 아무리 매력적인 진정성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비일상적 장소로서 방문객들에게는 ‘다른 곳’이다”고. 결국 제주는 관광객의 눈먼 응시 대상의 타자일 따름이다.
정책의 방향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두는 것이라 한다면 여태껏 제주 행정은 그 주체를 ‘관광객’으로 설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파괴되는 제주의 자연을 볼 때 이를 위한 세일즈 제주의 민낯은 부끄럽다 못해 참담하다.
고향이라는 포근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슴 뭉클한 곳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박제된 볼거리들로 메워진 도심의 거리, 끝없는 소비관성이 주종을 이루는 해안도로의 카페촌은 타자의 시선에 맞춘 관광제주의 현 실태다.
그동안 우리는 가지와 잎만 생각하는 근시안적 사고에 익숙해 왔다. 탑동이 매립되고, 중앙로에 거대한 지하공간이 조성되면서 그 때마다 많은 것을 잃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향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것은 우리가 초가집을 헐어내고 건물을 올리면서 샴페인을 터트린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후손들의 다수가 실향민이 되어 귀속할 곳 없이 유랑민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경제가 곧 행복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행복지수가 높은 네팔인들은 자연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히말라야는 상품이아니라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라산은 포장해야 할 상품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지역공동체는 끝내 ‘최대 다수의 최소 행복’의 사회를 낳고 만 것이다.
이제 반세기를 맞이하는 제주 개발과 관광산업을 냉철한 이성으로 바라보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루 수만 명의 관광객 내도통계치가 지역경제지표 상승의 반영일 수는 있으나 교통과 쓰레기 지옥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야하는 주민의 현실을 위해 울릴 종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도시가 고향으로서의 역할을 못할 때 삶의 공간으로서의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뿌리가 죽으면 가지도, 잎도 마르는 법이다.
관광지는 관광객에게는 힐링의 공간, 판타지의 공간이다. 하지만 정작 주민들에게는 무엇일까. 언어란 권력을 내포한다고 한다. 최대의 감탄사인 ‘청정제주’, ‘평화의 섬’, 환타스틱 아일랜드‘, 하지만 이 최대의 감탄사는 모순 자체를 은폐하는 어떤 권력의 환각제는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