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숲 속을 거닐며
역사의 숲 속을 거닐며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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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은 너무나 억울하게 죽게 되었으므로 형장에 들어가며 말했다.
“남이야, 너는 나와 무슨 원수가 있다고 나를 원통하게 집어넣느냐?” 남이는 대답했다. “여보, 영상만 억울한 줄 아오? 나도 영상과 같이 억울하오. 당신은 일국의 영상으로서 나 같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는 것을 보고만 있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래서 영상도 죽어 싸다고 생각한 것이오.”

조선의  세조 때 남이 장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종의 외손 되는 사람으로 17세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여진을 정벌하였다.
20여세에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세조는  죽을 무렵 병조판서의 자리를 허종에게 넘겨주도록 했다. 세조가 죽고 새로 예종이 섰는데  새 왕은 나의 20에 불과했다.

남이 장군은 세조의 시체가 아직 빈전에 있었으므로 궁 안에 들어와 일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밤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이 혜성을 보고 얘기들을 하였다. 한 사람은 말했다. “혜성이 나타나는 것은 나라의 장래에 큰 복이 올 것이다.” 남이 장군이 이 말을 듣고 “혜성은 옛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오는 현상이요. 나라에 옛 임금이 가셨으니 새 임금이 나셨다는 징조요.” 또 다른 사람은 “아니오, 자고로 지혜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상징이요.” 하고 말들을 했다. 그런데 남이 장군의 부하에 유자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남이 장군과 더불어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웠으나 양반의 서자라는 이유 때문에 크게 승진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전날도 승진의 건이 있었는데 역시 그 이유로 사람들한테 반대 당하였다. 그래서 뭐 특별한 공을 세워 출세를 하고 이 아니꼬운 양반들을 눌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유자광이 이 말을 옆방에서  엿듣고 다음날 아침 어전으로 가서 남이 장군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그래서  친국이 시작되었고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이 남이 장군에게 가해지기 시작했다. 누구하고 역모를 했느냐고 다그치자 있지도 않은 일을 물어오니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고문에 못 이겨 그는 왕의 친국하는 옆에 앉아 있는 영의정 강순을 가리키며 저 사람하고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죄 없는 강순도 끌어 내려져 모진 고문으로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거짓 자백을 하고  이제 형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남이 장군은 28세에 죽었다.
나는 이 사건의 전말을 이 정도로 알 뿐 더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역모라는 말만 들으면 떨게 되어 정신없이 무자비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왕권에 대해서다. 반역 혹은 반동을 최고의 악으로 정하고 순종을 최고의 선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이 왕권이란 것의 속성이다.
왕들은 무소불능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자기가 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여왕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자기도 저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팔과 다리며, 머리와 지력을 지닌 꼭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왕권이라는 권력의 옷이 그에게 막강한 힘을 부여한 것이고 이 힘은 반역하는 사람이 없이  받들어 주는 세력이 있음으로서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평등이 아니라 순종으로 이어지는 장 서열 구조가  이래서 이루어진다. 인권과 자유와 평등, 인간다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즉  오늘날 민주국가의 기본 이념을 이루는 말들은 그 세상에선 중요한 일들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에도 과거의 왕조, 혹은 왕조  같은 나라가 이 지구상에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얼마 전 강정구 교수는 “집안싸움인 이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테고, 물론 우리가 실재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우리가 다시 왕조로 돌아가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글이다. 학자의 역사를 보는 눈이 이 정도가 되면 거기엔 문제가 있다.

허 계 구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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