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시선·못살린 자책감 등 고통 속 삶
최근 사려니숲길 지킴이로 ‘힘겨운’ 출발

지난 2014년 4월 16일 승객과 승무원 476명을 싣고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침몰한 지 1073일.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세월호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고 당시 화물차 기사였던 김동수(51)씨는 소방호스를 이용, 침몰 직전까지 어린 학생들을 구조해 냈다. 그의 도움으로 세월호에서 빠져나온 학생들은 모두 20명. 그의 빠른 판단과 용기 있는 행동이 없었다면 어쩌면 세월호 희생자 수는 더 늘었을지도 모른다. 구조된 학생들 입을 통해 김씨의 의로운 행동이 세상에 알려졌고, 당시 입고 있던 파란색 트레이닝 바지 덕에 사람들은 그를 ‘파란바지 의인’으로 불렀다.
사고 후 3년이 지났지만 당시 더 많은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그래도 당신은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주위의 싸늘한 시선, 또 다시 닥칠지 모르는 대형사고에 대한 불안감으로 고통 속에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 그였다.

김씨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고 매일 다짐하고 있다”면서도 “생존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대책은 3년이 흐른 지금까지 아무것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정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사고 이후 엄청난 트라우마로 천직으로 여겼던 화물차 운전은 물론 정상적인 사회생활조차 어려운 상황.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 역시 가장의 몰락에 함께 고통 받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화물차는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고, 사고 이후 받은 보상금은 그동안의 병원치료비로 모두 쓰였다. 세 번의 자해 시도와 수개월 동안의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상태다.
그동안 세월호 소식을 멀리해 온 그지만 23일 배가 수면 밖으로 모습을 내비치자 “내 차를 꼭 보고싶다”고 전했다. 화물차 기사를 천직으로 여겼던 김씨는 한 달이면 25일을 그 차와 함께 했다. 자동차가 집이였고,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세월호에는 304명(미수습자 9명 포함)의 희생자만 있었던 게 아니”라며 “살아남은 자들과 그들의 가족 역시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얼마 전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제주도의 도움으로 3월부터는 사려니 숲길 지킴이로 조심스럽게 사회를 첫 발을 내딛었다.
한편, 사고 당시 함께 했던 제주지역 화물차기사들 중 일부는 운전대를 잡지 못해 공사장을 전전하고 있으며, 일부는 다시 화물차 기사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