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쯤 일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시골집 한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던 고가구를 봤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 색도 바랬고, 결코 유용해보이는 물건도 아니었지만 버리기에는 왠지 아쉬운. 그렇게 나와 우리 가족은 100년은 더 됐음직한 오래된 ‘궤’에 숨을 불어 넣기 위한 ‘재생(再生)’을 시도하기로 했다.
최근 우리 지역 사회에도 낙후되고 오래된 마을의 기억을 되살리고, 예전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한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때는 행정, 경제 활동의 중심지었지만, 이제는 정주민은 줄고 찾는 이 또한 드물어지면서 점차 쇠퇴하고 있는 이 도시를 관리해 정주여건을 개선해보겠다는 것인데, 논란은 많다.
“집안에 사소한 가구를 들일 때에도 가족회의를 한 뒤에 구매를 결정하지 않느냐”는 한 주부의 원망섞인 외침은 행정의 일방적 추진에 대한 불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한마디였다.
민과 관의 ‘소통부족’이라는 꼬리표는 주민이 주도할 수 있도록 최선의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면서 우리가 진짜 ‘재생’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도 전에 많은 어려움을 예상하게끔 만들고 있다. 실제로 주민과 행정이 생각하고 있는 재생에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재개발이 아닌 마을단위의 재생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장소(지역)에 담긴 이야기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재생사업이 경제활동과도 연계가 되지 않는다면 합의를 이룬다 하더라도 주민들은 단기간에 수익을 낼 수 있는 고도제한 완화나 문화공간 입주 반대 등의 철거형 재개발로 의견이 몰리게 돼 또다른 갈등의 빚게 될 것이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상징성을 강조하고 있는 행정에 반해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방안을 찾고자 하는 주민들의 의견이 어떤 방식으로 합의해 나갈지 기대가 되는 이유다.
시간의 흐름 속에 도시는 변해 쇠퇴했다고 한다. 그러나 30년간 철물점을 운영했고, 27년간 숙녀복을 판매했으며, 35년간 라디오 수리공으로 살아온 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어쩌면 변한 것은 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를 바라보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100년이 넘었다는 우리집 ‘궤’는 고가구점의 정비를 받고 다시 집으로 왔다. 버려질 뻔했던 그 ‘궤’는 우리가족에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찾아줬고, 우리집의 자랑이 됐다. 재생은 이런 것이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