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생·직장인 모두 시작의 계절
수능·취직시험 후 다시 경쟁
‘도전과 책임’ 그것이 삶의 가치
도전을 두려워하지 마라
타성 젖지 말고 고뇌하고 이겨야
봄 햇살 더불어 새로운 세계 활짝
3월을 맞아 어둡고 가라앉던 연구실에도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 학생들의 발걸음이 동면하던 캠퍼스를 깨우면서 새내기들의 시선을 붙잡으려는 각종 안내문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매년 반복되어 온 일이지만 새내기를 맞는 나의 첫 강의 역시 설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수험생으로서의 경쟁과 좌절의 구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려는 새내기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솔직히 설렘보다 긴장감이 앞선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 두고 남태평양의 한 섬, 타이티(Tahiti)에서 생을 마감한 고갱의 작품에 붙어있는 한 구절이다.
적도 아래에서 자신의 삶의 실존적 의미를 부단히 추구했던 한 예술가의 고뇌에 찬 흔적은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사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찾아 볼 수 없다. 먹고 자고 번식하는 생존 본능에 자족하지 못하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가려는 오직 인간에게 주어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다.
삶이란 어쩌면 고갱의 생애를 불면의 밤으로 지새우게 한 질문 그 자체에 대한 답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삶의 의미조차 무디게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욕망의 피라미드와 씨름하기에 바쁜 덧없는 생활에 대한 반성일 수 있다.
새내기들은 이제 자신들이 선택한 곳에서 ‘인생의 2막’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수학능력시험·취직시험 등에 지칠 만큼 지친 그들은 또 다시 경쟁에 들어가야만 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피투성이가 된 손발로 바위를 산 정상까지 올리지만 결국 평지로 다시 떨어지고 마는 시지프스(Sisyphus)의 절망의 무한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패배자로 남을 수는 없다.
생은 오히려 도전과 책임의 의미를 자각하고 그것을 삶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한없이 열려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의 실존적 물음을 통해 좌절하지 않는 또 다른 시지프스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것이 나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5월이 어린이들의 세상이라면, 3월은 새내기들의 세상이다. 대학뿐만 아니라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새내기들에게는 실로 벅찬 달이다.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이 시간은 한 조각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적 단편이면서도 영욕의 인류사를 쌓는 의미 있는 한 장의 벽돌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대학생활이든 직장생활이든 기존의 인습과 가치관에 그대로 젖어 들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찾아 볼 수 없는 또 다른 도전정신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학이나 직장은 단순한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나 단계가 아니다. 그래서 새내기들은 마을을 두루 지나가면서 여러 가지 풍물들을 마주치는 여행객처럼 기성세대가 쌓은 한 장, 한 장의 벽돌 위에 새내기들의 풋풋한 열정으로 무장된 삶을 쌓아야 한다.
성현들이 무일(無逸)을 강조한 것처럼 도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타성에 젖지 말고 스스로 고뇌하고 이겨내야 할 것이다. 젊음이란 저마다 자기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대학과 직장생활의 성패는 깨달음으로 무장한 내 자신이 기존의 가치에 얼마만큼 도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가치관과 타성에서 거듭나지 못하는 나의 대학생활, 나의 직장생활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따사로운 봄 햇살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계가 새내기들 앞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계에 맞서 좌절과 두려움보다는 용기와 도전으로 무장하여 스스로를 박차는 자유를 만끽해보라. 대학과 직장 문을 갓 들어선 새내기들을 보면서 봄이 오는 길목에 지성의 맑은 물줄기가 메마른 벌판에서 길 잃지 말라는 타고르의 시구가 생각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