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촉발 ‘3·1절 발포 자리’ 역사가 없다”
“4·3 촉발 ‘3·1절 발포 자리’ 역사가 없다”
  • 고상현 기자
  • 승인 2017.0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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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발포사건 70주년 (상)
당시 경찰 망루터 등 ‘현장’에 표지판 등 전무
도내 역사교육 현장도 관련 내용 학습 미흡
잘못 되풀이 방지위해 제대로된 관리 필요

 

[편집자주]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한 제주 4·3 사건이 발생한 지 70년 가까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극우 단체의 ‘4·3 흔들기’, 역사 왜곡 등으로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4·3의 도화선이었던 ‘3·1절 발포사건’을 기억하는 우리의 방식에서 그 문제점을 찾는다.

 

‘탕 탕 탕’

1947년 3월 1일 오후 관덕정 광장 앞에 있던 제주경찰서 망루에서 총성이 일었다. 그 결과 민간인 14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앞서 인근 북초등학교에서는 ‘미군정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친일 청산’ 등의 내용으로 3·1만세운동 기념식이 있었다. 이날 도민 상당수가 참여했다. 집회가 끝나 해산하는 길에 한 기마 경관이 어린애를 치고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에 주변에서 항의했고, 폭동이 일어난 줄 안 경찰이 발포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그달 10일 관공서 등이 참여한 대규모 총파업이 이어졌고, 미군정은 파업의 원인을 ‘경찰의 발포’보다는 ‘빨갱이의 선동’에 비중을 뒀다. 이후 서북청년단 등을 동원해 파업 주모자 수천 명을 검거하고, 테러와 고문을 일삼는 등 강공정책을 폈다. 미군정에 등 돌린 민심에 힘입어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미군정이 불의에 항거한 도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4·3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 관덕정 광장에는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는 내용의 안내가 전무하다. 경찰의 총격이 이뤄진 망루가 있었던 목관아지 외대문 서쪽 담장 안쪽을 비롯해 수십여 명의 민간인이 쓰러진 로베로 호텔 인근에는 그 날의 사건을 알리는 간단한 표지판도 없는 상황이다. 목관아지 해설사도 3·1 총격사건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해설사는 “주로 중세 역사에 대해서 설명할 뿐 현대사인 4·3은 안내를 안 한다”고 말했다.

일선 역사 교육 현장도 다르지 않다. 28일 제주도교육청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불의에 항거한 역사가 오롯이 담긴 관덕정 광장 현장 학습이나 3·1절 발포사건 등의 교육이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았다. 최근에는 4·3의 원인을 단순히 무장봉기로 설명할 뿐 4·3의 단초가 된 3·1절 발포 사건 등 발생 배경을 설명하지 않는 EBS 교재, 국정교과서가 나오면서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양윤경 4·3희생자유족회장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동성애자 등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독일이 자국민을 상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교육현장으로 활용하는 등 끊임없이 반성하고 교육하는 이유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라며 “우리도 4·3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제대로 된 역사 교육과 유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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