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 호주 시드니 교외의 어느 고속도로에서 느꼈던 소감이다. 앞서 가던 차들이 일제히 감속을 했다. 유심히 둘러보니 이제까지 90㎞였던 속도제한 표시가 갑자기 60㎞로 바뀌어 있었다. 다른 차들과 속도를 맞추고 나란히 주행하며 내 차 속도계의 바늘을 보니 거의 정확히 ‘60’을 가리키고 있었다. 곧 이어 도로는 급히 꺾여 있었다. 감속하길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또 하나 눈 여겨 보았던 것은 대부분의 차들이 주행차선으로 운행했고 추월 차선으로 달리는 차는 극히 적었다는 점이다. 옆자리의 현지인 왈 “추월차선으로 몇 십초 이상 운행을 하면 어김없이 딱지를 받는다”는 것이다.
경찰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단속하느냐고 물으니 “자기도 잘 모르지만 아마 인공위성으로 할 것”이라고 ‘비법’을 알려줬다. 가끔 너무 느린 앞 차를 만날 때 추월하라고 만들어 놓은 추월차선이 훤히 비어 있으니 마음이 조급하지 않고 편안했다.
사회학에서 힘이란 상대방의 행동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다. 그 방법에는 강제와 설득이 있다. 법을 만들고 위반자를 처벌하는 방법, 즉 강제에만 의존하는 힘은 하수(下手)에 속한다. 단속에 더하여 법의 존재에 대한 납득이 따르게 되면 법 집행이 쉬워지고 사회에 질서가 잡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경험이었다.
환경의 섬, 제주도는 지금 쓰레기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제주도민 모두의 행동 변화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런데 현실은 ‘단속’도 ‘납득’도 잘 안 되고 있다.
초등학교 바로 옆의 어린이 놀이터를 보라. 어른들의 담배꽁초, 아이들의 과자 봉지, 그 밖의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그런데 휴지통이 눈에 띄지 않는다. 휴지통이 보일 때까지 쓰레기를 손에 들고 다니라는 주문은 무리다.
아름다운 경관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해변가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쓰레기는 반드시 종량제 규격 봉투에 담아서 버려야 한다”는 경고판이 가끔 세워져 있을 뿐 쓰레기통은 보이지 않는다. 해변에서 걸어 나와 동네 안으로 들어가야 클린하우스가 나오니 많은 관광객들은 사용한 휴지나 마시고 남은 음료수 용기들을 바위틈이나 잔디 위에 그대로 버리고 간다.
관광 온 손님들에게 동네 가게에서 종량제 봉투를 사서 쓰라는 요구, 또는 쓰레기를 휴지통이 나타날 때까지 들고 다니라고 주문하는 것은 부당하다. 법을 지키도록 힘이 가지려면 법을 지킬 수 있는 조건을 먼저 만들고 나서, 법에 따라 이를 엄격히 단속하는 것이 순서다. 납득이 안 되는 법은 집행하는데 비용이 더 들고, 대개의 경우 단속의 손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만다.
힘(力)이 없는 법 행정이 해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진한 사람은 지킴으로써 손해를 보고 약삭빠른 사람은 안 지킴으로써 이득을 보는 불공평한 사회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시청이 도입한 재활용쓰레기 요일별 배출제도에 대해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에 달하고 있는데 문제는 설득에 있는 것 같다. 설득이 안되니 강제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클린하우스마다 단속요원을 배치해야 하고 CCTV 사진도 그것을 해독하는 데는 인력이 엄청나게 소모된다. 설득이 안 되는 이유는 제도가 불합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납득을 하면 나서서 협조할 정도의 시민의식을 제주도민들은 갖추고 있다.
아동들이 노는 어린이 놀이터와 제주도의 자랑스러운 해변의 너절한 쓰레기 문제도 쓰레기통을 비치해 주고 풀어야 할 사항이다. 세계 유수의 관광지나 공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쓰레기통이 비치되어 있지 않은 곳은 제주도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클린하우스는 제주도 주민용이다.
누구나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잘살고 싶어 하지만 우리의 발목을 잡는 ‘악마’는 항상 작고 세밀한 곳에 숨어 있다. 제주의 환경 보전의 첫 단추는 쓰레기에 대한 도민의 행동변화와 이를 이끌 수 있는 행정당국의 사고방식의 변화에 있다. 시드니 고속도로 이야기를 서두에서 꺼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