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켄 로치 감독 황금종려상 수상작
심장병으로 그만 둔 목수 이야기
관료주의 밀려 질병수당 수급 실패
결국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분노
영화 배경 영국만의 상황은 아니
깨어있는 시민의식 어느때 보다 중요
2016년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국의 영화감독 켄 로치(Ken Loach·1936~)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드디어 ‘다운’ 받아 관람했다.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이어 켄 로치 감독의 두 번째 황금종려상 수상이다. 그는 이주민·노동자 등 소외계층을 둘러싼 사회문제를 세심하고 밀도 있는 영상으로 만들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뉴캐슬, 주인공 다니엘은 솜씨 좋은 목수이지만 심각한 심장 질환으로 의사 소견에 따라 일을 그만둬야했다. 생계를 위한 질병수당 지급을 받으려면 일을 못할 만큼 아프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의사나 간호사도 아닌 ‘의료전문가’라는 직책으로 정부가 고용한 미국의 파견업체 직원은 심장병과는 무관한 신체 능력에 대해 기계처럼 질문을 해댄다.
결국 다니엘은 질병수당 부자격자 통보를 받는다. 생계를 위해서는 실업급여를 신청하거나 탈락 판정에 항고를 해야지만, 해결 할 문제 앞에 놓인 장애물은 한 둘이 아니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인터넷으로 자격신청을 접수하느라 진땀을 흘린 다니엘은 차라리 집을 짓는 게 낫겠다고 푸념한다.
수당 신청자들을 다루는 담당자들의 태도는 기계적이고 관료적이다. 유료 상담전화는 바쁜 담당자 대신 녹음 목소리와 비발디의 ‘봄’만 반복적으로 흘려보낸다. 다니엘의 딱한 사정을 안타까워하며 그의 접수를 도와보려던 직원은 ‘원칙’ 운운하는 상급자의 제지를 받고 포기한다.
다니엘은 수당 신청 과정에서 영혼 없는 담당자에게 사정없이 내쳐진 ‘싱글 맘’ 케이티를 만난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힘겹게 버텨내면서 어린아이 둘을 잘 키워내려 애쓰는 케이티에게, 다니엘은 마치 다정한 이웃 삼촌처럼 그들을 챙기고 도와준다. 생계 문제로 마음이 다친 아이들에게 놀랍고 섬세한 솜씨로 아름다운 나무 물고기 모빌을 만들어 선물하고 돌봐주면서 조금씩 그들의 마음을 치유해낸다.
실업급여와 질병수당 중 어느 쪽 지원이라도 받기 위해 요구 조건을 갖추려 노력하던 다니엘도 결국 담당 직원에게 인간적인 자존감까지 상처입자 결국 분노한다. 그가 항고를 위해 쓴 편지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말한다.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니다.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니다.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니다.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다.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도왔다. 자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다. 나는 다이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라고.
다니엘이 겪은 인터넷 서류 신청과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 사용의 일상화는 현재 중·장년 이상이 겪는 현실 문제이며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서류 발급·신청서 작성·은행 업무 처리 등의 전산자동화는 이미 흔하다.
현관문의 개폐, 보일러 가동·전등 켜고 끄기 등 아주 단순하고 필수적인 집안 작동조차도 전기·전산시스템에 의해 조절되는 매뉴얼을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노년이 되면 점점 새로운 것을 익히기 힘들어진다. 경제적 빈곤뿐만 아니라 인간을 대체한 기술 만능에서 비롯된 소외 역시 심각한 사회 문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 보다는 훨씬 나은 복지 제도를 갖고 있는 영국이지만 그 안에서도 운영자 위주의 비정하고 관료적이고 기계적인 비인간화가 가슴 서늘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를 상영작으로 일정 기간 내 건 영화관이 제주에 없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기가 막히는 국정 농단 사태를 겪게 했던 이 ‘나쁜 정권’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란 명단을 만들며 시민의 건강한 비판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예술 활동을 금지하고 곤란을 겪게 했다. 정권의 문제를 지적하며 깨어있는 시민의식으로 국정을 감시하는 일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하게 느껴진다.
복지 정책 강화를 좌편향으로 몰아대고 비판적 사고를 거세하려는 정권이 우리들을 어떤 현실로 몰아낼지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곧 대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