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 사랑’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 사랑’
  • 임정민
  • 승인 2017.0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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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손이 없다’는 ‘신구간’
요즘은 사철 이사 등 다소 무관심
시대 따라 많은 것들이 변화

어느 집 설 차례 신정에 지내기로
설엔 가족여행으로 ‘명절 힐링’
차례나 여행이나 목적은 화목

우리 조상들은 날짜에 따라 방향을 바꾸며 일을 방해하는 귀신이라는 ‘손’을 무척 경계했다. 매달 음력 10일씩을 기준으로 첫째·둘째 날은 동쪽, 셋·넷째 날은 남쪽, 다섯·여섯째 날은 서쪽, 일곱·여덟째 날은 북쪽에 손이 있다고 했다. 대신 아홉·열째 날은 귀신이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손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음력 9일과 10일, 19·20일, 29·30일엔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이런 문화 때문인지 우리 가족이 제주도로 이사 올 때에 친정어머니는 손 없는 날을 택일해 주셨다. 자식들이 무탈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셨다. 그뿐만 아니라 방위·간지까지 세심하게 일러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제주에선 사택에서 생활하는 관계로 3년에 1번씩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육지에 없는 독특한 ‘신구간’ 때문에 날을 기다려야 했다.

대한(大寒) 후 5일에서 입춘(立春) 전 3일 사이로 보통 일주일인 신구간은 이른바 신구세관(新舊歲官), 즉 지상의 모든 신격(神格)이 천상에 올라가 새로운 임지를 받아 내려오기까지의 공백 기간이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지상에 신령이 없기 때문에 평소에 금기시됐던 일들을 해도 아무런 탈이 없다고 한다.

신구간에 주로 하는 일은 이사를 비롯해 부엌·문·화장실 고치기 등 집 수리, 외양간·울타리 고치기, 나무 베기·묘소 수축 등 다양하다. 만일 아무 때나 이러한 일을 하면 동티가 나서 화를 입는다 한다.

신구간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마음 놓고 하는 기간인데, 근래 도시지역에선 이사하는 일이 강조돼 주로 이사하는 기간으로 인식하게 됐다. 그래서 제주에선 셋방살이하는 사람이나 새 집을 장만한 사람이나 일제히 신구간에 움직이므로 거리마다 많은 이삿짐을 많이 보게 된다.

신구간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신구간이 아니면 좋은 집을 구하기 어렵기에 어쩔 수 없이 ‘동화’돼야 했다. 이사 수요가 몰리면서 불편함도 없지 않다. 부담스러운 이사비용과 인터넷 이전 등. 시간도 비용도 2배 정도 부담을 해야 했다. 제주 생활이 20년을 앞두고 있다 보니 신구간이 서서히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됐다.

요즘은 신구간 문화에 다소 무관심해 지는 듯하다. 계절에 관계없이 이사를 하는 이들도 있고 길거리엔 신구간 세일 현수막도 많이 줄어들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다. 전통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세배를 드리던 게 설날의 풍경이었으나, 요즘은 디자인도 다양하고 입기에도 편리한 계량한복을 선택하기도 한다. 온가족이 함께하는 전통 놀이 대신 명절을 이용해 가족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늘고 있다.

한국에 시집 온지 20년이 넘은 일본여성 Y씨는 가족회의를 거쳐 설 차례를 신정에 지내기로 했다고 한다.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는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설 연휴가 가족여행 하기에 좋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Y씨는 20여년의 한국생활에서 명절 증후군이 심각했다고 한다. 많은 가족들이 모여서 하는 일은 남자들은 술이나 윷놀이를 하고 여자들은 음식을 만들거나 종일 상차림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즐거운 명절이 아닌 긴장과 스트레스가 많은 명절 증후군이 심각해진 것이다.

그래서 결정하게 된 가족여행은 명절 증후군이 아닌 ‘명절 힐링’ 여행이 되고 있다고 한다. 조상대대로 지켜온 전통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문화도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상들을 위한 차례도, 온가족이 함께 떠나는 여행도 목적은 집안의 화합과 사랑일 것이다.

Y씨는 시집 왔을 당시보다 지금의 한국생활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한다. 가족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삶의 활력이 된다고 한다.

이렇듯 세상은 변화한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의 가치인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적지 않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성장하는 제주지역 다문화가정에 올해 정유년엔 사랑의 웃음이 더욱 활짝 필 수 있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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