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수량 선생은 조선중기 중종·인종·명종때의 문신으로, 1491년(성종22)에 황용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태어 났다. 본관은 밀양, 자는 군수, 호는 그의 생가 지명을 따서 붙인 아곡이며 시호는 정혜이다.
23세 때인 1513년(중종8)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향교의 훈도로 첫 공직을 시작한 이래 39년동안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한성부판윤, 우참찬, 좌참찬, 호조판서 등의 벼슬을 거쳐 1554년(명종9)에 정이품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64세에 별세했다.
명종 때 두 번이나 염근리로 뽑히면서 1552년(명종7)에 주세붕·이황 등 33인과 함께 청백리에 녹선됐다. 박수량 선생에 대한 문헌은 정사인 조선왕조 실록에는 청백리로서 청빈한 삶을 살았던 자세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으나, 그의 문집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박수량은 1546년에 청백리에 올랐다. 38년 동안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의 관직 생활을 했지만 집 한 칸도 마련하지 않는 청렴 결백한 삶을 산 인물이다. 명종이 어느날 암행어사를 보내 박수량의 사생활을 알아보라 했다. 천장에서는 빗물이 새고 끼니도 잇지 못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는 것을 알고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전남 장성군 소나무 숲 한 묘지앞을 지키는 낯선 비석, 이름도 내용도 없이 단 한자의 글자도 새기지 않아 붙여진 이름 ‘백비’. 그가 죽었을 때 집에 돈이 없어 가족이 상여를 메고 고향도 가지 못하니 신하들이 임금께 청하니 임금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이틀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예관을 보내 조문을 하도록 하면서 장례물품의 지원과 함께 관인들로 하여금 장레를 호송하게 하는 등 범국가적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지킨 청렴의 절개,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 이름,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의 백비, 이름조차 없는 묘비에 아로새겨진 목민관의 참뜻을 생각한다. 이렇게 청백리 아곡 박수량선생의 청빈한 삶의 또 다른 상징인 백비는 후배 공직자들을 말없이 깨우쳐 주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조직 내 청렴문화 확산을 굳게 다짐해본다.
<제주시 연동주민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