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으로 8월 초하루가 넘으면 제주의 온 산야, 들판이 벌초 인파로 붐빈다. 우리 제주지역은 타시도와 달리 제주도민의 고유의 조상숭배사상과 제주인의 섬세한 근면정신으로 제주지역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벌초를 하지 않고 8월을 넘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손들 중 조상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큰 흠이 되지 않지만 벌초에 참석하지 않은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죄송스러움을 감수해야 하며 어떤 종친회에서는 불참자에게 궐금(闕金)을 받는 가문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궐금은 친족이 의미를 희석시키고 친족의 정을 멀리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벌초 문화도 시류의 변화에 따라 많이 변화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 일례로 장례문화가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많이 변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하고 시대의 시류에 맞는 변화이다. 고려시대에는 매장보다 화장장례를 귀족들의 선호하였으며, 매장은 화장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만이 땅값이 아주 싸기 때문에 매장을 했다는 역사자료를 읽은 기억이 난다. 화장문화가 우리 선조들의 선호한 장례문화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농경사회로 한 집안, 친족 일가가 한 농촌에 모여 일년 열두 달을 같이 살았으니 벌초도 가능하고 벌초 하는 일이 조상숭배사상을 고양시키는 좋은 풍습일 수밖에 없었고 친족의 유대, 자손의 교육 등을 위해서 극히 필요한 가치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가 급속히 변화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세계화 산업화 시대가 오면서 우리들은 시간과 이동공간을 자신의 마음대로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제주의 벌초기간을 추석 연휴에 하는 문화로 개혁하면 어떨까? 행정계층제만 혁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환경에 맞지 않는 문화는 생활환경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고향농촌에는 젊은 사람들을 보기 힘든 농촌으로 변한지 오래다. 농촌에는 벌초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더러는 도시에 여유 있게 사는 젊은이들과 친족규율이 너무나 엄격해서 서울이나 일본 등에서 벌초하기 위해서 비행기 타고 오는 집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에너지 낭비 뿐 아니라 사회문화생활로는 부담되는 일이 아닌가? 문화는 자율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인데, 친족 혹은 윗분들의 압력으로는 부드러운 가족문화가 유지 될 수 없는 것이다.
최근 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단 한 명도 태어나지 않은 읍겦?동이 전국적으로 8군데에 이르고 10명 이하인 곳은 290곳, 100명 미만인 곳은 2,056곳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농촌은 아이들의 울움소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끊어져 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통계를 보고 그에 맞는 생활 문화로 고치자는 정책은 없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세계화 산업화에 밟히고 치인 이 땅에 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을 등지고 고향을 등지고 세계의 流民(유민)으로 전락하고 또한 산업화라는 파도에 휩쓸려 각박한 도시생활에 자기부모도 병원에 입원 시키고 연락을 끊는 이런 삭막한 세상에 과연 벌초문화가 이대로 좋은 것인지 한번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우리 나이가 된 사람은 벌초 문화에, 농촌의 서정에, 고향의 포근함에 미련이 있는 자가 대부분일 것이다.우리 세대는 농촌은 희망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농촌에 가서 서정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마무리 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자란 우리들이다. 그러나 사회가 이런 걸 어찌 할 수가 없는 노릇 아닌가?
작년 벌초에 내려왔던 큰아들이 서울로 돌아가던 날, 나와 집 사람이 제주 공항에서 흔드는 손을 뒤로하고 쫓기듯 출발 윈도우로 떠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주고향의 보름달은 서울에 사는 아들들이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그것은 세사가 몰고 가는 ‘메아리’ 없는 비바람에 의해 고향을 떠난 젊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주지 못하고, 각박한 도시의 적막은 고향 달빛을 막아버릴 것만 같아서다.
김 찬 집<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