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답하기 그지없는 현실
대한민국이 싫다는 젊은이들
중·고교생까지 촛불시위
암담한 현실에 대한 분노 표출
더 이상 정치인에게 기댈 수 없어
깨어있는 시민의식 만이 대안
사라봉 자락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싸늘하다. 저 멀리 부두에 정박하던 배들이 빠져나가자 잔잔히 이는 물결이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제주바다를 가리켜 ‘너무 슬프고 아름다운 바다’라고 한 어느 시인의 글을 떠올려 본다. 지금 바다를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것은 그의 심중에 남아있던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자기인식의 실존적 고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의 길을 가지만 결국 삶이란 ‘가슴으로 이야기하는 정직한 만남’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행복과 불행의 분기점은 사회와 나, 개인과 개인의 정직한 만남의 여부가 아닌가 싶다.
사라봉 정상에서 바라본 시가지는 평온하다. 그러나 그 이면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우리사회의 출구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혼돈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거든”이란 구절이 생각난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서 20대의 젊은이가 한국을 떠나면서 던진 말이다. 실제 네티즌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93%가 ‘한국이 부끄럽다’고 답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믿음 하나로 살아왔던 기성세대에게는 실로 충격적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부끄럽게 만든 것일까? 왜 그들은 우리 사회를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지옥 같은 현실, 헬 조선이라 일컫는 것일까?
권력과 부의 양극화가 일자리의 양극화로 대물림하는 현실이 아닐까. 사실 이런 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로 태어나는 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중고등학생까지 참여하는 광화문 앞 촛불 시위는 암담한 현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내건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너무도 많은 역설을 경험했다. 그래도 ‘행복대통령’을 약속한 이 정권만은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게임 룰 역시 공정한 것이 아니라는 게 드러나고 있다. 행복해진 것은 ‘행복하세요’를 외친 권력자들뿐이었다.
한쪽에서는 예술의 공적기능을 수행하여 국민 누구도 창조적 기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문화융성을 국정과제로 내걸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문화 권력자들의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 예술의 얼굴을 가장한 권력의 얼굴이었다.
정상을 가장한 비정상의 대가는 국민들만의 분노로 나타나고 있다. 쓸 곳이 없어 흥청망청 쓰는 사람과 쓸 것이 없어 허덕이는 사람이 공존하는 사회, 그 속에서 속 빈 강정처럼 껍데기만 내뱉는 나의 학문적 대안은 왠지 공허해 보인다.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나라가 털끝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18세기 현실을 개탄하면서 “지금 당장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는 일제의 지배였다.
오늘 날 ‘대한민국호(大韓民國號)’의 위기를 고치고 바꾸어야 할 자는 누구일까? 정치인들은 아니다. 그들은 권력에 결핍된 자들이다, 그들은 권력의 균열이나 결핍이 클수록 오히려 그것을 활용하는 정치기술자들이다.
결국 우리 사회를 고치고 바꾸어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시민들이다. 그러나 민주항쟁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선택한 것은 정확히 말해 우리들 자신이다.
다산은 “관(官)이 현명해지지 않는 까닭은 민(民)이 제 몸을 꾀하는 데만 재간을 부리고 관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현재의 난국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 모든 현상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실존적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동물과 달리 생물학적 가치를 넘어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음을 뜻한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되돌려 내 나라 공동체의 의미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이 정치인들에게 기댈 수 없는 이유다. 깨어있는 시민의식 만이 표류하는 위기의 대한민국호를 구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