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73) 시카고대학교 석좌교수는 역사학자이자 미국의 저명한 동북아 전문가다. 그가 지난 21일 열린 ‘제주4·3 평화포럼’에 참석해 미군정(美軍政)과 관련 아주 중요한 증언을 했다. “4·3사건 당시 주민 수만 여명이 학살당한 배경에는 미군정과 남한 내 극우파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는 요지였다.
커밍스 교수는 “미군정이 대규모의 주민 학살로 상황이 악화되는 과정을 사실상 묵인하고 방조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방첩부대 자료’를 인용했다.
“그 당시 제주도지사였던 유해진은 극우파 인물로 서북청년단 등 우익세력과 연결되고 있었다. 유 지사는 3·10 총파업 참여자 등 이승만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보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커밍스 교수는 식량배급 비리 등의 폭정으로 미군 조사관이 유 지사를 해임할 것을 요청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결국 1948년 4월3일 수세에 몰린 남로당(南勞黨) 제주도당이 무장투쟁을 일으키기 전까지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존 메릴(72) 전 미국 정보조사국 동북아국장도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를 싸잡아 비판했다. 4·3사건 때 미국의 군사고문들이 제주 곳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승만 정부의 초토화 정책 등으로 인한 학살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그는 “새로 나올 국정교과서가 주민 학살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이승만을 국부(國父)나 영웅으로 만들까 걱정스럽다”는 이색적인 주장도 폈다.
이들의 증언으로 인해 제주 4·3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은 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또한 그동안 미진했던 미군정 및 이승만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새로운 접근과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제주 4·3이 아직도 ‘미완(未完)’으로 남아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