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소장, 제주시 일대에 분포
제3소장, 제주시 일대에 분포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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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소장과 제주조점(濟州操點)

①위치
동쪽으로는 제주시 폐기물처리장 입구 약 150m 지점에 건영농축목장의 경계로 사용하고 있는 삼나무 옆에 있는 돌담이 동·서쪽 1㎞정도의 원형 그대로 있는 하잣이며 이곳에 바령팟(1,500평)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목지동산에는 목자들이 마(馬)를 감시하던 곳(초소)에 돌로 쌓은 1.5평(높이 120cm)의 원형(圓形)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제주대학 입구 동쪽과 오라골프장 한천으로 이어진 하잣은 흔적만 남아있다.  3소장 안에는 삼미목장과 제주산업정보대학 그리고 삼의양오름과 남쪽의 관음사 사이에 중잣이 있고 뒷편(남쪽)에 홀담으로 된 상잣이 한천상류로 이어지는 곳으로 기다란 목장이다.

봉개동 산 71번지에 정조 4년(1780)에 김영수 목사가 횡징(橫墻) 1110보(步)를 쌓아 한라산 산림지대로 올라가는 말들을 막아 관리하는 데에 편리하게 한 상잣과 원형이 남아있는 간장(간담)이 북쪽으로 내려가면서 중·하잣과 연결되어 있으며, 1950년대에 회천동 산 8·9·10번지에서는 중잣에서 간장이 만나고 약 1.5㎞ 떨어져 간장이 하잣으로 연결되면서 이곳에 윗바령팟, 아래 바령팟, 그리고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다.
이곳에 목자위전과 목장전은 둘레가 잣으로 쌓여 있으며 현재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②목장실태
제주읍지, 탐라지초본, 탐라고사의 목장도형에는 마 187~429필, 마감·반직감·군두·목자 12~42명, 수처(못)가 5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천단의 소림지못과 삼의양악의 정상에는 샘(泉)이 있어 지금도 말과 소들이 물을 먹고 있다.
3소장의 출입문이 많이 있었던 것은 건천이 비교적 잘 발달되어 있어서 이들 하천들이 소장 내 각 자장을 구분하는 자연적 경계역할을 하였고 그 자장에 출입하는 문들이 하천 사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소장 경계에 문 저목양, 지금의 회천동에 있었던 3소장의 출입구로 문 빌어잇도, 지금의 화북천 상류에 해당하는 하천에는 문 삼능도, 지금의 영평동에는 문 갓남도와 한라산을 오르는 문인 문 흑덕양이 표시되어 있다.
 봉개동에는 ‘   통낭머르’라는 지명이 있는데 속괴앗 동북쪽에 있는 고개로 말이 먹는 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매립하여 운동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탐라순력도에 제주조점은 숙종28년(1702) 11월15일 순력은 제주읍성에서 성정군의 군사훈련과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가중군(假中軍:임시로 임용된 중군) 이항, 성장 4명, 치총(雉摠:꿩 잡는 사람)2명, 인민(人民) 7319호, 전답 3357결,  문묘(文廟;향교)의 제기(祭器) ·제복(祭服)·서책(書冊), 군기(軍器), 성정군 1263명, 창고에 있는 곡식 3만40여석, 등을 점검하였다.
그러나 제주마필과 목자 및 보인 등이  점검에서 제외 된 것은 이미 조천조점에서 한라장촉의 삼의양악쪽에 있는 일(日)字屯馬들이( 남환박물의 화북소 제2소) 원장(圓場)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지난 10월20일 점검하였으며 측자 목장은 일(日)자목장보다 동쪽에 있다(3소장에 해당됨). 애월소의 제2소 진(辰)·결(結)字屯馬(4소장)의 말들은 애월조점(11월14일)에서 점검했다고 생각된다.
제주마를 점검함에 있어서 김상헌의 저술한 남사록(1601)에 의하면 봉송마지폐(封送馬之弊, 말을 바치는 폐단)는 삼읍 수령이 관할구역의 모든 말을 마적부에 올려서 공공연히 억지로 말을 빼앗았다는 전례(前例)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는 민간인들이 밭이 매우 척박하여 농사가 어려워 축산으로 얻은 물자에 의존하였으나 말 한 마리를 빼앗기면 열 식구가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점마지폐(京點馬之弊, 서울에서 온 벼슬아치가 점마할 때 오는 폐단, 點馬別監:마적, 낙인을 확인하여 말의 건강상태와 죽은 말 등을 밝혀 부정을 막고 효율적인 방책을 세우도록 조정이 제주도에 봄과 가을에 파견한 관리(點馬御使監)도 있었는데 이것은 말을 점열할 때 모든 백성들이 문안드리고 대접하는데 분주하여 제대로 농사일을 못하는 자가 많았으며, 국마가 새끼를 배었는지는 뇌물의 정도에 따라 정해졌으며 그리고 좋은 말은 모두 징발하였다. 또한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도 이때 생긴 뇌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1965년 가축인공수정소로 시작되었던 축산기관인 도립목장이 산천단 북쪽에 있었으며 이 도립목장은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목장용지 9만평 확보하여 출발한 관영목장으로 후일 제주도 축산진흥원이 되었다.

현재  봉개동 산 71번지 Thoroughbred종 목장, 회천동 산 7·8·9·10번지에서 제주마 50여 마리를 연중방목하고 있고 명도암 관광목장에는 제주마 30필, 당나귀 1두가 있고, 동원목장에는 젖소 100여 마리, 삼미목장에는 소가 사육되고 있다.
하잣과 켓담(곗담)을 이용하여 샘물목장 등은 젖소 200여 두와 제주마, Thoroughbred종 30필, 건영농축목장에 Thoroughbred종 30여필을 사육하고 있다.
이곳의 대표적인 목장으로는 삼미목장, 제일협업목장, 회천공동목장, 용강마을공동목장, 아라마을공동목장 그리고 난지농업연구소의 축산센타에서 제주마사육과 마(馬)와 관련된 체계적인 학술적(學術的) 연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목장과 직업훈련원, 제주노인전문병원과 양지공원, 제주산업정보대학 및 국제자유도시 프로젝트인 첨단과학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4소장과 탐라순력의 제주마필에서 계속)

<관련 고사성어>

죽마고우 竹馬故友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함께 놀던 옛 친구. 젊을 때부터 함께 놀며 자란 오래된 친구.
[유] 斷金之交(단금지교)/金蘭之交(금란지교)/芝蘭之交(지란지교)/知己之友(지기지우)/知音(지음)-백아와 종자기의 고사/刎頸之交(문경지교)/水魚之交(수어지교)-유비와 제갈량의 고사/膠漆之交(교칠지교)-아교와 옻처럼 떨어질 수 없는 가까운 사이/관포지교(管飽之交)-관중과 포슥아의 고사

[출전]《世說新語》〈品藻篇〉《晉書》〈殷浩專〉
[내용]진(晉: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371∼372) 때의 일이다.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殷浩)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 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王羲之)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이 죽고 호족(胡族)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관광생명자원과
(제주마문화연구소장·제주도문화재위원·제주마주협회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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