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막은 오른다”
“그래도 막은 오른다”
  • 이종일
  • 승인 2016.10.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연은 관객과의 공동창작 의미
약속 불이행은 ‘문제’의 자백
부친상 불구 열연 배우 기억 먹먹

윤석화 연극 개막 1주일전 교통사고
고민 끝 ‘휠체어’ 연기 감행 결정
관객과 약속·진솔한 교감 자리 기대

시간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 달리 흐른다. 즐겁고 아쉬운 상황의 시간은 가을날 같고 지루하고 고통스런 상황은 한여름 같다. 같은 시간이라도 물리적으론 같으나 심리적으론 큰 차이를 느낀다.

매번 공연을 준비하면서도 이 같은 현상을 겪는다. 다만 공연은 힘든 준비과정을 거치든 수월하든 관계없이 개막 시간이 다가올수록 시간은 점차 빠르게 흘러 항상 촌각을 다투게 된다. 아마도 라이브가 주는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공연은 다른 예술매체와 달리 미리 관객과 공연 날짜를 정해놓고 준비하는 특수성이 있다. 공연은 관객이 객석에 앉아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만큼 관객은 공연의 절대적인 요소다. 따라서 관객과의 약속은 단순한 의무를 넘어 공동창작의 의미를 갖는다.

즉, 약속된 공연의 불이행은 단순한 사정이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에 문제가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다. 물론 천재지변이나 국가적 재난 등의 불가항력적인 사태의 발생으로 인한 불가피한 경우는 별개일 것이다.

필자도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당시, 가수 이문세의 천안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고민 끝에 취소했다. 공연 팀은 경제적 손실을 감당했고 매진을 기록했던 관객들도 단 1명의 항의 없이 동의했다.

그러나 작품의 완성에 참여하는 관객의 공감과 동의 없는 주최 측의 사정에 의한 불이행은 쉽게 용인되지 않는다. 그만큼 관객과의 약속은 절대적인 것이다.

예전에 소극장에서 연극을 할 때 일이다. 출연 여배우가 공연 중에 부친상을 당했다. 신인이었고 먼 지방이 고향인 여배우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선 공연을 중단해야 했지만 대체할 배우가 준비되어있지 않았고,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공연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맡은 역할이 술집창부여서 무대에 나가 웃음을 팔고 무대 뒤에선 한없이 울던 모습이 아직도 먹먹하게 기억된다.

그 공연의 관객은 20여명이었다. 그렇게 버틴 연극배우의 연간소득이 모든 직종의 최하위 연봉이라는 보도는 과연 이 땅에서 연극을 하는 의미와 관객과의 약속을 목숨처럼 여기는 태도가 과연 정상일까라는 ‘덧없는’ 의문을 던지게 했다.

윤석화는 올해 연극배우로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40년이면 일반적인 직장은 정년퇴직을 했을 기간이고 인생의 전성기를 보낸 세월이다. 누구든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아온 여정이 담겨있는 시간들일 것이다.

그 여정을 돌아보는 의미로 준비한 공연이 ‘마스터 클래스’라는 연극이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의 예술세계를 다룬 작품으로 18년 전 초연해 ‘이해랑연극상’을 안겨주며 그녀의 진가를 확인시켜준 또 하나의 작품이다.

그런데 윤석화가 작품 개막을 1주일 앞두고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갈비뼈 6대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관객과의 약속을 1주일 남겨둔 시점에서 찾아온 사고는 약속대로 무대에 설 수 없는 사태를 초래했고 그녀는 절망했다. 대부분의 관객이 양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개막을 미뤄 10월 7일부터 휠체어에 탄 채 관객과 만나기로 했다.

40년 쌓아온 명성에 자칫 오점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이다. 온전한 몸 상태로도 녹녹치 않은 배역을 휠체어에 앉아 그것도 중상의 몸으로 해야하는 연기의 완성도에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관객과의 약속이다. 지각은 불가피했지만 결석은 할 수 없다. 오히려 행동의 제약에 따른 새로운 정서가 동반될 것이고 그간 간과했던 작품의 내용이 새롭게, 절실하게 다가와 표현될지도 모른다. 관객 또한 사정을 미리 인지하고 참여하지만 동정어린 시선이 아니라 가슴을 열고 좀 더 진솔한 교감을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40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쉼 없이 달려온 그녀가 휠체어에 앉아 뒤 돌아보는 지난 세월에 만감이 교차 할 것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많은 무대에 존재했어도 새로운 무대는 항상 신입이다. 그래서 배우는 정년퇴직이 없다. 커튼콜을 무사히 마치고 휠체어에 앉아 퇴장하는 모습만으로도 40년 열정의 감동이 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