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방울 작품으로 유명한 화가
세련된 건물·작품도 좋아
준비 미흡한 개관전은 아쉬움
일생의 화업 느낄 자료·작품 부족
대형 몇 점과 브로슈어 1장
개관 좋은 일이나 배어나는 씁쓸함
추색(秋色) 깊어가는 제주에 ‘물방울’ 그림으로 알려진 김창열 작가의 미술관이 지난 주말 개관되니 예술과 정치계 유명인들뿐만 아니라 수수한 제주도민들 사이에 평소 잘 못 보던 해외(海外) 멋쟁이들까지 저지 예술인 마을에 가득 모여들었다. 즐거운 일이다.
문을 연 미술관은 아주 단순한 육각형의 숯 빛 노출콘크리트 덩어리가 가로 세로 이어져 정방형을 이루고 그 가운데 생긴 빈 공간에 얕은 물을 채운 중정이 있는 세련된 건축물이다. 천정이 높고 너른 3개의 갤러리는 상대적으로 좁은 복도로 연결되어 말없이 이동하게 만들었다. 대형 작품 위주로 20여 점만 걸린 전시장에서는 고요한 침묵과 물방울의 투명성으로 내면을 들어다보게 만드는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좋은 일이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진지한 미술관 전시에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전시품의 미적·역사적 가치에 인문학적 맥락의 해석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세심하게 기획된 전시는 우리들 삶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컬렉션의 성격과 해석을 통한 전시와 다양한 프로그램 등으로 그 사회나 국가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 문화적인 변화나 갈등에 직면했을 때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다리와 같은 가치 있는 감정을 제공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줄 수 있다.
유기적인 비영리 사회 교육기관으로서 미술관은 지역 공공교육기관을 직접 연관한 프로그램들도 진행하며 그 결과물을 관람객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 미술관은 교육의 장이자 만남의 공간이고 휴식의 장소다. 다양한 멀티미디어 아카이브를 통해 소장품의 의미, 가치와 보존에 대해서도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뮤지엄 아워스 (Museum Hours)’라는 영화의 어느 한 장면. 빈 미술사박물관 전시작품 중 브뤼겔(Pieter Bruegel 1528-1569, 벨기에 화가)의 작품에 대해 도슨트가 관람객들에게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화가의 관심 계층, 구도와 의미 등에 대해 설명하고 질문한다. 관람객과 작품 해석에 이견이 생기자 도슨트는 자신의 견해를 꼭 따라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을 감상한 시인 오든(W. H. Auden)의 시를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자료로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 시를 찾아보니, ‘오든’은 “옛 거장들은 고통에 대해 결코 틀린 적이 없다”는 걸 자신의 시 ‘미술관에서’에 표현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고 있는 인간들이 그 시를 쓴 ‘1940년 현재’에도 여전히 있음을 한탄한 것이다.
21세기 우리들도 마찬가지임을 ‘브뤼겔’의 그림과 ‘오든’의 시에서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심도 있는 연구와 안내가 얼마나 호기심을 자극하며 작품을 우리들 삶으로 확장하게 해주는지 인상적으로 느끼게 해준 장면이다.
김창열미술관은 제주특별자치도가 건립한 공공미술관이다. 그 작가의 일생 화업(畵業)의 과정을 잘 느낄 수 있도록 좀 더 세세한 자료들과 작품들로 구성한 개관전이어야 했다. 전 생애 창작 활동과정과 작가가 기증한 미술관 컬렉션을 소개하고 미술관의 방향과 활동에 대한 설립취지가 담긴 미술관책자 한 권 정도는 나왔어야 했다.
개막을 한 달 남기고 관장을 공모하고 학예사 등 선발 절차를 9월 안에 마무리하는 방식으로는 어림도 없다. 대형 작품 몇 점과 얇은 브로슈어 한 장의 개막전이라니……. 공공교통 불편의 한계는 언제 해결이 될는지.
경기도 양평, 경상북도 경주 등에서 이 작가의 미술관 건립을 위해 공을 들였지만 결국 제주도에서 건립했으니 두 도시는 ‘닭 쫓는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제주의 독특한 풍광을 황토 빛과 검은 선으로 표현하며 주목받은 변시지 화백 미술관 건립에 제주도는 인색했다.
말 못할 저간의 사정들은 잘 모르겠으나, 김창열미술관을 다녀오는 발걸음에 씁쓸함이 배어나는 건 어쩌지 못하였다. 신임 관장의 책무와 제주도의 책임이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