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말 중에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No Worries! It will be all right.)라는 표현이 있다. 지나치게 걱정을 하기보다 현 상황을 인정, 타개하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결국 우리는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다 잘 될 거야’라는 이 한마디는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도 남는다.
호주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의 일이다. 시드니 공항에서 멜버른 행 비행기로 옮겨 탄 뒤 이륙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비행기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감 무소식이었다. 마음 같아선 승무원에게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 항의는커녕 짜증을 내는 사람도 없었다. 승객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신문이나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기다렸다.
사실 조종사가 아무 이유 없이 이륙을 안 했을까? 무슨 일이 있겠지 하며 기다려주는 눈치였다. 2시간 쯤 지났을 때 기장이 안내방송으로 오래도록 기다려줘서 고맙다, 곧 출발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승객들은 ‘땡큐’로 화답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북새통을 이루는 제주 공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승객들의 항의 장면과 함께 저녁 뉴스에 나올 일이지 않는가? 호주의 첫 인상은 이방인인 나에게 실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 모습에 여유가 묻어나는 것은 단지 풍부한 자연환경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배려해주는 삶이 결국 나의 소중한 삶이 존중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사회적 윤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대를 일으켜주어야 내가 좌절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살다보면 흐르는 건 세월이다. 이런 저런 시간의 벽돌들을 허물었다가 올려놓고, 다시 쌓겠다며 다짐하던 2016년 1월 1일. 그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계절을 세 번 보내, 추석을 맞고 있다. 설렘으로 내디딘 올 한 해, 결코 순탄한 길만 달려온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번 추석만큼은 가슴이 설레고,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추석은 그 어디를 가나 우리 민족의 집합적 기억인가 보다.
10년 전 멜버른 한인교회 추석맞이 행사에 참석했다. 가족 간의 대화와 소통마저 뜸해버린 이민사회에서 가족이 말긋말긋 씩씩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은 이런 행사 덕분이다.
행사가 끝날 무렵 한 교민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하고 선창했다. 누가 등 떠밀어 떠나온 것도 아닐텐데 타국에서 느껴야 했던 울컥하는 기분 때문이었을까?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의 목소리들이 한 데 모아지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올 한 해 우리들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 없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때로는 주저 앉고 싶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들의 가슴을 울려줄 노래를 선창해 줄 수는 없을까? 달리기를 할 때 더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거리를 뛰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레이서들은 골인지점에서 안게 될 영광에 앞서 참으로 외롭다는 느낌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응원의 박수라도 보낸다면 레이서들에게는 더없는 용기가 되지 않을까?
올 한 해 우리 가족은 장거리 정도가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암벽을 오르는 고독과 절박함으로 지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향에서, 직장과 학교에서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짓눌렸을 때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가족이다. 이해인 수녀의 ‘삶이 무거우니’의 한 구절이다. “고향에 갈 때는/ 몸도 맘도 /가볍게 해달라고/ 흰구름에게 부탁한다/ 꽃들에게 부탁한다/ 새를 보고 부탁한다”
고향과 가족, 이 얼마나 간절함의 대상일까? 그래서 오늘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아 서로에게 “걱정마. 다 잘 될거야”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면 어떨까?
도민사회도 마찬가지다. 어찌 문제가 없을 수 있겠는가? 비록 제주도정과 도의회에 흉허물이 많아, 그렇게밖에 하지 못해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정말 응원한다”는 말 한마디가 있었으면 한다.
그게 결국 제주의 동력이다. 더도 덜도 아닌 올 추석 보름달처럼 우리 모두 “걱정마. 다 잘 될 거야”라는 여유로운 한가위가 되길 소망해본다.